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6 1장16-17

푸른 섬 2012. 10. 28. 17:18

로마서강해 6 1장16-17

부끄럽지 않은 복음


음성설교

로마서1장16-17

본문 17절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구원을 어떻게 얻는가라고 했을 때에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말을 합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구절이 로마서1장17절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라고 해놓고 믿음이라는 의미를 또한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이유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 때문이지요.

여기에 나오는 믿음이 두 가지 이기 때문에 앞의 믿음은 주님이 주시는 믿음, 즉 오직 은혜로 주시는 믿음이고, 두 번째 나오는 믿음의 단어는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믿음으로 봅니다.

문제는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믿음의 주체를 누구로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앞의 믿음과 뒤에 나오는 믿음의 주체를 다르게 봅니다.

물론 같게 본다고 하지요. 그런데 해석하는 것을 보면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적적인 주님의 은혜라고 말을 하지만 두 번째 나오는 믿음은 인간의 결심, 즉 피나는 노력이 함께 할 때 그 믿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12장1절에 나오지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인간의 피나는 노력이 제대로 된 믿음을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십자가의 피공로만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수고를 함께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로마서12장1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대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신학에서는 성화론을 이런 식으로 주장하지요.

이들은 구원과 성화를 별개로 봅니다. 구원은 십자가지신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봅니다. 성화도 그렇게 본다고는 해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씀을 지킨다고 주장하니 말입니다.

제가 지난주 설교시간에 언급했었지요. 성도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라고 제 블로그에 댓글을 달았다고 했지요. 이런 사람의 주장이 개혁주의 성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입니다.

물론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철저하게 공격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신학 말입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성화론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쪽은 구원론에 한쪽은 성화론에서 인간의 의지를 주장하고 있지요.

이렇게 말하면 개혁주의 성화론에서는 뭐라고 할까요? 우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지만 저들은 인간의 결심을 가장 중요한 키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알미니안주의들은 뭐라고 할까요? 우리도 믿는다. 그런데 성경을 봐라. 사람이 믿는다고 해야 믿지 않는가? 사람이 믿고 따르지 않으면 그 은혜라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도 전적인 은혜를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 땅에서 믿는 것은 인간이지 않는가?

사실 우리들이 신학을 공부해보면 알미니안이나 개혁주의나 똑 같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한쪽은 구원론에서부터 시비를 걸고, 다른 한 쪽은 성화론에서 시비를 걸고 있지요.

결국 땅의 일은 인간이 설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나요. 오늘도 여러분이 결심하고 예배당에 오지 않았으면 여기 못 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누가 주님이 보내 주셔서 왔습니다라고 할까요? 그런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주체가 성령님이 됩니다. 이유는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지요.

요한복음16장13,14절을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께서 주체가 되셔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은 오직 누구만을 전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건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셨지요. 그것이 곧 성령의 일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오직 사람밖에 보이지 않지만, 정작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은 사도들은 하늘 우편에 계신 주님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들은 죄인으로 보이지요.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십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16절17절을 잡아 놓고 왜 17절부터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17절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설교되어지고 설명 되어 졌어요.

그런데 17절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16절 말씀을 거쳐서 가야 됩니다.

16절 말씀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17절 말씀을 갖고 그런 식으로 오해하지 않지요. 물론 안다고 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면 16절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있습니까?

사도바울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합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여러분 사도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할까요?

나는 복음이 자랑스럽다는 것의 반대말일까요? 물론 그런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복음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역설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이런 삶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좀 더 생각해야 합니다. 왜 갑자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가 말입니다.

이 말을 하기 전에 14절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로마에 있는 너희 즉 헬라인, 즉 지혜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지요.

고린도 전서1장18-25절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 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을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본문을 읽게 되면 왜 사도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의 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하나님,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없는 복음이라는 것이지요.

지혜 있는 자나, 총명한 자들이 십자가의 도를 들어보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것이 없어 보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표적이 나타나야 참 지혜로운 말씀이라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왜 표적을 많이 행하셨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유대인들은 표적이 나타나야 하나님의 지혜로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십자가의 도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저런 도는 나와 맞지 않아요. 저것을 믿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짓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지요. 그러니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입니까?

유대인은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은 특히 이방인들이 로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 ,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말이 안 되는 , 어리석은, 부끄러운 소식이라는 것이지요.

로마서가 전개되는 내용을 잠시 생각해 보면, 모든 인간이 죄아래 가두어졌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어요. 오직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인간이 한 일이라곤 죄 밖에 지은 것이 없어요. 한 걸은 더 나아가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고 해도 여전히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면 살수 없는 인생으로 사도바울이 고백하지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랍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의롭다 여김을 받았어요. 그리고 성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주님이 하셨다고 해요.

세상에 이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교회라도 나와야, 내가 기도라도 해야, 내가 헌금이라도 해야, 내가 봉사라도 해야, 내가 전도라도 해야 구원을 주시고, 천국백성으로 인정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 십자가의 도는 이런 것들을 완전히 부정해 버립니다. 네가 기도하는 것, 네가, 전도하는 것, 네가 봉사하는 것, 네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어떤 것도 십자가의 도에 보탬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됨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고린도전서1장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어리석은 즉 십자가의 도가 사람보다 지혜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하심, 즉 십자가의 도가 사람보다 강하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하는 말이 1장26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 말은 육체를 달 지혜로운 자도 있고, 능한 자도 있고, 문벌 좋은 자도 고린도 교회 안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부정적으로 말을 합니까?

27-29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핵심이 이것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곧 성도들은 자신들을 어떠한 자들도 인식한다는 말입니까?

자신은 늘 지혜 있는 자, 강한 자, 있는 자라고 여기는데 십자가 앞에서 부끄러운 자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설교 앞부분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사람들은 자꾸 자신의 행함을 십자가의 도에 집어넣으려고 할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받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당당하지가 못해요. 내가 뭔가를 해야 당당하게 구원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갖는 생각이지요. 여러분이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우겨도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즉 당당하게 구원받겠다는 이유는 자랑하고 싶어서입니다.

십자가의 도로 구원시키신 이유는 아무 육체도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은 인간들의 어떤 육체든 십자기 지신 주님 앞에서 자기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나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고 하는 자들은 누구를 자랑할까요?

그야 뻔합니다. 십자가의 피로 말씀을 지킨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들의 태도를 볼까요?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너희들도 이렇게 살아라는 태도 아닙니까? 자기 자신들은 자랑스럽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십자가의 피 능력만을 자랑하거든요.

저들은 행위를 내 놓으라고 자꾸 우기지요. 그것만이 아니라고 자꾸 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 즉 복음만을 전합니다. 그러니 서로 맞지 않지요.

사도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한다는 말은 오늘 제가 설교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십자가 복음이 믿는 자들을 만들어 내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하박국2장4절을 봅시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모든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복음을 믿고 살아가니 당연히 어떤 대우를 받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 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르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8장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것을 말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의 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결코 외부환경에 의해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로 살려지는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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