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8 2장1-11

푸른 섬 2012. 11. 11. 20:31

로마서강해 8 2장1-11

하나님의 심판


음성설교


로마서2장1-11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라고 부르지요. 여기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장32절입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들이 과연 자신들이 사형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형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행하고 그렇게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한답니다.

이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창세기에 나옵니다.

3장을 봅시다.

1-3절입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간교한 뱀의 질문에 여자는 정확하게 답변합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자 뱀이 이렇게 말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5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주어 남편도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말에 그대로 넘어간 것이지요. 그러니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누구만이 갖고 있어야 하는 지혜입니까?

3장22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악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 단독 소유였습니다.

선하다 악하다의 기준을 갖고 계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여자도 이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자의 눈에 이 지식을 지혜로운 지식이라 여겼습니다.

그렇지요.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데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행동입니까? 선한일을 행하고, 악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 이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여자는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 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남편에게 주고, 남편도 알아서 먹지요. 강제로 여자가 먹인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남편도 먹었다는 말은 여자는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근거하에 남편에게 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옳다 그러다라는 판단이 나온다는 자체가 이미 사망아래 놓였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이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태어난 가인과 아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창세기4:6,7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선악을 알고 있는 가인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이 선임을 알려 주셨지요.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들로 데려나가 죽였습니다.

가인은 선악을 알고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신 것에 대해 분내는 것은 악한 것임을 알고 있어요. 분내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선임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벨을 죽입니다.

선악을 알고 악을 행하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아벨을 죽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이 가인의 후손 라멕에게로 가면 어떻게 드러날까요?

지금까지 선악이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과 관련되어 있었다면, 물론 가인에게서도 조금 비춰집니다. 그러나 라멕에게 오면 선악이 자신을 중심으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4장23-24절을 봅시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 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이제는 선악기준이 라멕자신입니다. 자신을 이롭게 하면 선하고 자신을 해롭게 하면 악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는 죽입니다. 즉 사형을 시키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누구를 앉혀놓았습니까? 라멕 자신입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어떤 식으로 그 본모습을 드러내는지를 우리들이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남을 판단하는 사람.

남을 판단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마태복음7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나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1-5

마태복음 7장과 오늘 본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마태복음7장1-5절 말씀이 오늘 본문의 원본이라 보시면 됩니다.

문제는 마태복음7장을 사람들이 읽으면서 어떻게 해석할까요?

내 눈 속의 들보를 빼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야지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헤아려 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외식하는 자여라고 하셨을 때에는 일차적으로 유대인이지만 모든 이방인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2장으로 오니 그렇지 않습니까?

비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까?

헤아려 준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헤아려 주려면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합니까?

다시 로마서2장으로 가 봅시다.

2,3절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심판자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여기에서 한 번 더 되새기겠습니다. 바울은 이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상황에서 구약을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니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심판자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을 어느 위치에 두고 있습니까?

심판주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선악을 기준으로 옳다고 선언하는 모습이 심판주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라멕처럼.

4절에서는 또 다른 입장에서 심판의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바탕은 자신들이 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니 당연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겠지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태도가 바로 스스로 판단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하실까요?

인간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선악기준으로 심판을 하십니다.

선악을 말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반드시 행위를 거론하게 되지요.

그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신답니다.

7절을 봅시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그리고 곧장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을 말하면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겐 환난과 곤고를 주신답니다.

문제는 어느 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할 수 있는가입니다.

인간들은 각자의 선악기준이 있다고 했지요. 더 중요한 사실은 선악기준이 있다는 자체가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독자적으로 가져야 할 선악을 아는 지식을 인간이 가졌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악한 일을 쏟아내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7-10절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이 갖고 있는 선악기준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하겠지요.

그래. 선을 행하자. 그 선이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가 오니 당을 만들지 말고 진리를 따르자.

여러분도 이렇게 적용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우리 마음은 기계입니다. 선악기계. 무엇을 보든지 하나님의 선악기준과 상관없는 기준으로 선악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물론 분별해도 행동에 옮겨지지 않을 때도 많지요. 자신이 자신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보더라도 이 기계는 작동합니다.

무엇을 위해. 라멕처럼 자신이 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8절에서 오직 당 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표현은 단지 복음에 반대하는 모임을 만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임이라는 곳에는 반드시 누가 있습니까? 리드가 있지요. 왕이 있습니다. 판단하는 왕이 있어요. 그 모임 자체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요.

인간들은 늘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리. 주의 자리에 앉으려고 행동을 합니다.

인간들이 행동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판단자, 심판자임을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분명 선을 행하는 자가 있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선은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선이 아닙니다. 악도 마찬가지이지요. 악도 아담 안에서 생각하는 악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본문을 볼 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악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악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선악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이 선악과는 전혀 다릅니다. 만일 동일하다면 이 땅에서 영생을 얻을 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보시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선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벨을 보았지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셨지요. 제물 때문에 아벨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정성을 빼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록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11장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이 드린 예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벨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자로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선하다 악하다의 기준을 예수님의 피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행위가 선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와 상관없다면 모두가 다 악한 행위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피 때문에 성도를 선하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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