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10 2:17-29

푸른 섬 2012. 11. 25. 16:40

로마서강해 10 2:17-29

성령과 칭찬



음성설교

로마서2장17-29

로마서는 누구에서 보내진 서신입니까?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로마서1장5,6절을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율법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말입니다.

사도행전15장1-5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하는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사건은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안디옥은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인해 흩어진 자들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이들은 헬라인, 즉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어 이들을 권하게 했습니다. 이후 바나바가 사울, 즉 바울을 다소에서 찾아 만나 안디옥에 데려 와 둘이 함께 일 년 동안 큰 무리를 가르쳤고 이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됩니다. 이후 바나바와 바울은 일차 전도 여행을 떠났고 다시 돌아온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형제들을 가르쳤는데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바울및 바나바와 이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아주 큰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논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던 형제들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몇 사람을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행15장7-11절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가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가 분명히 말했지요. 율법은 우리 조상이나 베드로 자신을 포함한 당시 사람들도 능히 멜 수 없는 멍에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결론을 내립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즉 율법의 멍에를 메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합니다.

그 당시 안디옥교회의 주변 환경이 어떤 식으로 흘렀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요.

이 세 가지는 연결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피가 든 고기를 먹는 행위가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로마서1장을 살펴보았지요.

우상숭배는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첫째는 음행, 즉 음행의 극치인 동성연애로 나타났지요. 또한 상실한 마음의 모습, 즉 탐욕의 모습으로 끝장을 보지 않습니까?

그 탐욕의 모습이 피채 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이방인 교회, 즉 안디옥 교회나, 로마교회는 율법과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지요. 할례를 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방인교회는 율법과 관계있을까요 없을까요?

이방인교회들은 이미 알고 있지요. 안디옥 교회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단지 당시 삼가할 세 가지 내용만 삼가면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이렇게 되면 이방인 교회는 자신들은 율법과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이 뻔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율법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집어 던져버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겠지요.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지금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왜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을 언급할까요?

유대인과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이방인과 무슨관계가 있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유대인들과 율법을 본격적으로 언급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 고발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확신합니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확신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단지 아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라고 확신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살지 않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9장16절 이하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계명을 지켰습니다. 허풍이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바탕을 빡빡 끌어내십니다. 갈고리 알아요? 우리 어릴 때 마른 솔잎을 땔감으로 썼잖아요. 그때 갈고리로 끌면 아무리 두껍게 쌓인 솔잎도 바닥이 드러나지요.

부자청년의 마음은 재물에 있었지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재물이 많으니 근심하며 가버렸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만남을 생각하지 않고 로마서 이 본문을 본다면 우리들은 쉽게 유대인들을 생각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로만 율법 지킨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주 나쁘게, 아니면 우습게 여기지요. 수준 낮은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로마서는 이것을 다 깨어 버립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다 지켰다는 것은 곧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축복입니다. 재물의 축복입니다. 율법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물질적 복을 받는다고 나와 있어요.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영생도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맞다고 지난주 누가복음10장을 언급하면서 말씀드렸지요.

그러니 부자 청년은 율법을 지켰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재물을 많이 주셨고, 또한 당연히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떠나가 버립니다. 근심하며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근심합니까? 많은 재물 때문에 근심하지요.

지금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던 재물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율법대로라면 재물 많은 것이 당연히 축복이지요. 그런데 그 축복의 내용 자신의 우상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 이 사람은 율법을 지킨 자가 아님이 드러나지요.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축복받은 사람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본인은? 본인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칭찬 엄청 하겠지요.

지금 우리들이 보는 본문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로마서2장21절부터 뭐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자기 자신을 가르칠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어도 배웁니까 배우지 않습니까?

안 들어요.

도둑질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것을 단순히 수준 낮은 유대인들의 행위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만일 수준 낮은 유대인들의 행위로 본다면 이런 사람은 지금 지적당하는 유대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을 말할 때에는 마태복음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을 꼭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청년에게는 이 말씀이 해당사항이 없어요.

주님은 무엇을 보신다고 하셨습니까? 은밀한 것을 드러내어 심판하신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이 말씀은 인간자체를 언급하고 있어요. 마태복음 5장을 꼭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청년은 빠져 나가 버리지요.

그러니 이 말씀을 수박겉핣기식으로 이해하시면 말씀을 잘못 보는 것이지요.

마음속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어요. 물론 표출된 문제도 당연히 포함하고 있고요.

결국 23절에서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라고 구약을 끄집어 들어 옵니다.

이사야52:5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 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이스라엘이 이방의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명기28장20절 이하를 보면 악을 행하면 포로로 잡혀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악이란 다름 아닌 여호와의 말씀 곧 율법의 명령들을 지키지 않으면 포로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이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았습니다.

로마서2:17-23절을 보면 이것이 무슨 포로로 잡혀갈 일이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방인들 입장에서 이 말씀을 읽게 되면 너무 가볍게 읽게 되지요.

그러나

2:17-23절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어떤 역사. 율법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아 포로로 잡혀가서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일을 이스라엘백성이 했습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인 로마교인들이 이 말씀을 읽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요?

로마서2:24절에 나오기 전까지는 가볍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게, 유대인들, 그렇게 확신을 갖고 있으면서 실제 행동은 엉망이었네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2:24절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간단한 말씀이 아니구나라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하는 이방인들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하겠지요.

그러면서 이제 율법과 할례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당신의 할례를 무할례가 됩니다.

이 말이 이해 됩니까? 할례를 이미 행했는데, 몸에 흔적이 있는데 율법을 범하면 무할례다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눈으로는 말이 안 되잖아요.

할례를 행했다 하더라도 율법을 범하면 무할례가 됩니다. 여기에서 율법을 끌고 들어오잖아요. 앞부분에서는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을 말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지요.

도적질, 간음, 우상숭배를 언급했는데, 이것은 앞서1장18-32절에 대한 요약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제 그렇게 보이나요. 이것은 또 무엇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안디옥교회에 삼가라고 한 내용과 많이 비슷하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6절입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되면 이방인들, 즉 무할례자인 로마교인들이 자신들을 생각하겠지요. 자신들은 무할례자잖아요. 그런데 만일 자신들이 율법을 온전히 ,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온전히 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언제든지 할례자로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정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바울은 지금 이방인을 본격적으로 유대인 속으로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즉 율법 속으로 확 잡아 끌어들입니다.

28-29절을 봅시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진짜 유대인은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감추어진 , 숨겨진 유대인들이 참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표면적 육신의 할례를 행한 자들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조문을 따라 할례를 행한 자들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칭찬이 누구에게로부터 옵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육신의 할례를 행한 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자기 자신을 얼마나 칭찬하고 있습니까? 이 말은 곧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들은 항상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할례를 받은 자들은 이들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옵니다.

성령에 의한 마음의 할례를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도 반드시 유대인 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안디옥교회가 받은 권면을 단순하게 그 시대 상황에서 문제되는 것에 대한 권면으로 이해한다면 이들에겐 율법과는 전혀 관련 없는 자들이 되지요. 그렇다면 이들에게 율법은 버려야 하는 것이고, 유대인들은 단지 자신들이 비판할 수 있는 비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들이 다시 재판관의 자리에 앉는 꼴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게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그 이름을 모독한 자가 지금 로마서를 받는 로마교인,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나아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켜서 성령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능력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로마인들이 살아가는 현장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 속에서 율법은 여전히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전하는 도구로.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도구로.

그래서 율법과 성령을 상두마차로 오늘본문의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로부터 칭찬이 옵니다. 율법을 행한 자는 늘 자신이 확신한 삶을 살고, 너무나 훌륭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내 놓을 것이 너무나 많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할례를 받은 사람은 말씀을 통해 늘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올 리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옵니다. 이유는 그 일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무엇을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축복에 참여한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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