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9 2:12-16

푸른 섬 2012. 11. 18. 18:05

로마서강해 9 2:12-16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음성설교

로마서2장12-16

이제부터 사도바울은 범죄의 기준을 분명하게 밝히기 시작합니다.

1:18-23절에서는 우상숭배에 대해, 그리고 1:24-27절까지는 우상숭배로 인한 동성연애가 나옵니다. 그리고 28-32절에서는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실상을 보여주면서 그 끝은 자신들이 심판주임을 드러냅니다.

2:1-11절은 자신들이 심판자로서, 심판 주로서 참된 심판주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어떻게 표출해 냅니까? 바로 우상숭배로, 동성연애로, 상실한 마음의 모습으로 자신들이 심판주임을 증거하면서 살아갑니다.

영원히 찬송할 분은 주님 되신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으로 넘어 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들 속에 뭐가 들어 있는가?

12절을 보게 되면 율법을 처음으로 언급합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물론 모세오경을 떠 올릴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많은 율법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요약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0장25-28절을 봅시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어떤 율법교사가 말한 율법에 대한 정의를 옳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 사랑 따로 이웃사랑 따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교사가 얼마나 똑똑한지 뒤에 나오는 질문을 보면 알 수 있지요.

29절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를 알겠습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알아요.

그래서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이랑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은 율법을 지킬 자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했다는 것은 나오지 않아요. 그러나 이 사람이 어떻게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단어가 나오지요.

옳게 보이려고.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이야기를 해 줍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보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마침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렀는데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마리마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을 돌봐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가 정답을 말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제사장, 한 레위인은 예루살렘과 무슨관계가 있을까요?

율법교사는 금방 알아차립니다. 우린 뭐가 뭔지, 그냥 종교 관련자 정도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율법교사는 그 정도가 아니라 이들이 희생제물을 드리는 자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자들임을 알고 있어요. 그 일과 관련된 자들임을 눈치 채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마리아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인식합니까?

유대인들이 이들과 상종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더러워 피해 다닙니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제사 드리는 일을 한 제사장과 한 레위인은 강도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으로 여겼던 제사장과 레위인 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냐라고 물으셨고 율법교사는 당연히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지요. 그런데 참 답변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인데 이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을 하지요. 자기는 나름대로 사마리아 사람 피하고 싶은 차원에서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율법교사와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예수님 자신에게 중심을 돌리게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서 율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이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율법교사야 자존심이 상해서 난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지 않을 거야 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길가다가 강도 만 난자 있으면 도와주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할 필요가 있습니까?

필요 없잖아요. 이미 영생을 얻었는데 무슨 피 흘림이 필요합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율법교사, 그리고 한 제사장, 한 레위인, 어떤 사마리아 사람 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율법 교사잖아요. 그러니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까요 듣지 않을까요?

이미 예수님께서 답을 다 주셨습니다. 한 제사장, 한 레위인, 율법 교사니까 당연히 이 부류에 들어가지요. 특히 그는 자신만만했잖아요. 옳게 보이려고. 자신이 얼마나 옳은 자인가를 스스로 판단해 놓고 예수님께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판단에 동의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대답이여 자비를 베푼 자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라 했지만 , 그의 답변 속에 이미 사마리아 사람을 제거시키고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라고 했을 때에는 자신의 사고방식, 자신의 세계관, 자신의 신앙관과는 이미 동떨어진 예수님의 말씀이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교사가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달라요.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칭찬을 하셨지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니 율법교사가 자신이 얼마나 옳은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자신은 이미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께 질문을 했지요.

그렇다면 이 사람에겐 예수님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이 사람에겐 소용이 없어요.

이미 자신이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데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서 의롭게 해 주시는 은혜가 필요 없지요.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강도만난 자임을 알아차려야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이 사람을 헷갈리게 하셨지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입니다.

영생을 주실 분을 눈앞에 두고도 이 사람은 자신이 놀던 판 데로 가야 합니다.

놀던 판으로 가라고 예수님께서 부추기시는 것이지요. 칭찬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 때문에 율법교사, 즉 율법의 전문가는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제 로마서에서 처음으로 율법이 등장하지요.

율법이라면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 없이 죄를 범한 자가 있고 율법이 있고 죄를 범한 자가 있다고 합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라고 하십니다.

자, 율법 교사를 살펴보았지요. 그런데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었습니까?

없었지요. 이유는 무엇입니까? 노는 판이 달라요.

유대 판에서 노니 예수님판과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면 인간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그래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자라고 하겠지요.

누구 앞에서. 십자가지신 예수님 앞에서 그런 소리 하고 있다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꼭 누구 같아요. 율법교사 같아요. 율법교사수준이라도 되면 이해가 되겠지만 그 수준도 안 되면서 율법교사 흉내 내고 있어요.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율법을 듣는 자는 있지만 행하는 자는 없다는 말씀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게 2:17절 이하에서 말씀하십니다.

12절에서 율법 없이 죄를 범한 것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14-15절을 봅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미 율법교사가 무엇이 옳은지를 율법을 갖고 알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어도 무엇이 있다. 고발과 변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발과 변명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없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고발하고, 변명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과 여자에게서 흘러나온 내용물입니다.

양심이 있다는 자체가 그 자신이 율법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임을 증거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심 때문에 논란이 많지요. 선한 양심이 있니 없니 라고 말입니다.

이미 선한양심이라는 표현자체가 저주아래 있다는 증거물입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아도 이미 그들 스스로가 율법적 기능 즉 고발과 변명-이 내장되어 있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자임을 드러냅니다.

16절을 봅시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심판주 되신 예수님의 심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심판과 달라요.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십니다. 우리들이야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심판은 드러난 것을 갖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것의 본래 의도하는 것까지도 다 들추어 내어 심판하십니다.

율법 교사를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사람의 은밀한 마음까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은밀한 것을 드러내셔서 도저히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노는 판이 십자가판에 의해 산산조각 나야 합니다. 십자가 피만이 온 세상에 가득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인간들은 십자가 판위에서 놀지 않고, 여전히 자신이 예전에 놀던 가락대로 자신의 판위에서 놉니다.

꼭 율법교사처럼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아무리 십자가 복음을 들어도 돌아서면 자기 판위에서 놀 자들입니다.

은밀한 것들 드러내셔서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심판 속에 날마다 살아가시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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