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7 1장18-32

푸른 섬 2012. 11. 4. 19:32

로마서강해 7 1장18-32

영원히 찬송할 주님



음성설교

로마서1장18-32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신약에서 하나님이라고 하면 어떤 하나님을 떠올려야 할까요?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3장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가룟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심을 보고도 자신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이유를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사망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은 곧 성령을 이들에게 주심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제자들이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그리고 다시 구약성경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볼수 없다면 그 사람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할 때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로부터 누구에게 나타난다고 하십니까?

하늘로부터 모든 경건치 않은 자와 불의에 대해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하실까요?

사람들은 땅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하늘, 즉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나올 진노의 나타남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결코 그런 일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진노라 생각하지 않는 내용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시는 이유가 그냥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경건치 않고, 즉 불신앙과 불의를 행하는 것 때문에 진노를 내리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신앙과 불의에 대해 진노를 내리시는 이유는 이미 이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사람들 속에도 두셨고, 또한 그들의 눈에 보이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심판의 근거가 있지요. 무조건 믿지 않아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20절을 볼까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즉 그의 영원하신 능력, 신성을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의 증거물이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건치 않은 자와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진노 내리시는 것은 합당합니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 핑계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만 생각해 보면 경건치 않은 자라는 표현은 믿음에 대한 내용으로 볼수 있고, 불의는 그 믿음 없음에 대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9:31절을 보면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경건과 그의 뜻대로 행하는 이라는 말을 연속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니 경건하고 의롭다는 다른 표현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라는 것은 반드시 그 마음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한 가지 또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로부터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여기에서 창세로부터라는 말은 만들어지는 시점부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셨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만드셨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과 모든 다른 만물들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고 살아야 하겠지요. 물론 지금 로마서 여기에서는 이것을 살짝 감추면서 말을 합니다.

21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십계명 1,2 계명이 떠오르지요.

출애굽기20:3-6절까지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애굽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지금 어떠하다는 말입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말씀하고 계시지요.

창세로부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십계명이 없어도 모든 인간에게는 이 계명이 내장되어 있다는 말씀이 되겠지요.

지금 로마서 1장에서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알아도 어떻게 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즉 하나님을 아주 존경하여 높이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자신들이 지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 새, 네발가진 짐승, 기는 것들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우상숭배 한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가 거꾸로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사람의 형상이나 새, 네발가진 짐승, 기는 것들을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지혜롭다는 입장에서 우상을 섬긴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우상이 참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그 신을 참 신이라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형상에게 영광을 돌리고 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아감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진노가 좀 이상한 진노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진노를 내린다고 한다면 벌 받아야 된다고 생각되지요. 그런데 그런 진노가 아니라 인간들이 살아가는 일상이 하나님의 진노라 말씀하십니다.

24-27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번 더 버려두신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영광을 돌려야 할 분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조물에게 영광 돌리고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중에도 뭐라고 외칩니까?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여기에서 주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지요.

진정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은 그 주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이미 결론이 나 있지요.

바로 주님이 누구신가? 누구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결과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졌고, 결국 이들이 하는 짓은 동성연애가 됩니다.

말씀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동성연애. 여자가 여자끼리 결혼하고 , 남자와 남자가 결혼하는 것인데, 한국에서 이런 사람들이 좀 있지요. 선진국은 오히려 법적으로 이런 결혼을 인정해 주지요.

그 결과 이런 행동들에 대한 보응 즉 벌을 스스로 돌려받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는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결과로 동성연애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단지 그 당시 음란한 로마문화 때문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을 주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마지막 지점이 동성연애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동성연애가 무엇이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사실입니다. 그 진노의 결과물이 동성연애입니다.

그러니 동성연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왜 옹호할까요?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동성연애가 과거엔 소극적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당당해지는 시대가 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얼마나 큰지 아시겠지요.

뿐만 아니라 동성연애로 인해 벌도 받고 있지요. 그러니 이 전체가 하나님께서 마음의 정욕대로 버려두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우린 동성연애로 인해 병에 걸리면 벌 받았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동성연애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창세기2장24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첫 번째로 주신 계명을 어긴 사항을 두고 로마서1장에서 이 말씀을 하실수 있겠지요.

그러나 동성연애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가? 그 자체가 무엇을 공격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에베소서5장3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남자와 여자의 만남, 결혼은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됩니다. 땅의 결혼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증거하는 도구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도구가 남편과 아내, 결혼이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동성연애는 이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단순히 결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정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25절 한 가운데서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이시로다 아멘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외침 위 아래로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둔 상황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신 상황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제 왜 사도바울을 통해 이 본문에서 동성연애를 일번으로 꺼집어 낸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것은 소돔성이 멸망했던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천사들이 소돔성을 방문했을때 이들의 악함이 드러난 모습이 바로 동성연애의 모습이었지요. 창세기19장에 나옵니다.

자신들이 재판관 즉 주의 자리에 있지 어디 감히 롯, 너가 우리의 재판관이냐라고 하죠.

거류민이, 어디 우리의 재판관이 되려고 하느냐? 우리가 재판관이다. 옳고 그름은 우리가 판단한다. 우리가 주인이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도 두 번째로 28절부터입니다. 여기 접속사 또한은 병열관계의 접속사입니다. 어떻게 병렬이 되는지 봅시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말은 경건치 않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러게 되니 이들은 상실한 마음, 즉 하나님 없는 마음대로 내버려 둠을 당합니다.

곧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이 있지요.

누가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인간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 하나님께서도 적극적으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고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이 합당한 일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24절에서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 동성연애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29-3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능욕(거만-남을 멸시하는 태도)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약속을 깨는)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불의, 추악, 탐욕, 악의는 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은 타인에게 행하는 문제 즉 일대일 관계에서 발생하는 죄악입니다.

수군수군하고, 비방하는 것은 여러 사람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언론적인 죄악들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능욕하는 것, 교만한 것, 자랑하는 것, 악을 도모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를 높이는 악들입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 우매한 것(타인을 이해하지 않는 것), 배약하는 것, 무정한 것 , 무자비한 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악들입니다. 마치 독재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결국 개인적이 악함이 타인과 관계되고, 여러명이 합하여 악함이 드러나고, 그 속에서 자신이 높아지려고 하고, 궁극적으로 자신이 주의 자리에 앉는 모습으로 악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동성연애와 악한 모습들을 나열한 이유입니다.

이런 모습들의 궁극적 지향점이 주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32절을 봅시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32절을 통해 자신들이 주의 자리 앉아서 모든 것을 행할 뿐 아니라 옳다고 하지요.

이런 인생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진노를 경험하고 살아가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는 이것을 진노로 알지요.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의 피 공로만 내세웁니다. 십자가의 피 복음만을 전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주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미움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의 자리를 결코 빼앗끼지 않겠다는 자들로부터 참 주님이신 예수님을 전함으로 왕따를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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