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5 1장8-15

푸른 섬 2012. 10. 21. 18:30

로마서 강해 5 1장8-1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음성설교

로마서1장8-15

그저께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가 식사자리에 갔답니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목사인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는 아무나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그 목사에 대해 변론해 주었습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아무나 하느냐라고 했을 때 상당히 기분이 나빴답니다.

왜 기분이 나빴을까요?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무슨 자존심일까요? 목사라는 자존심.

적어도 내가 목사인데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더욱이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 아닙니까?

제가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나이냐?

말씀을 생각해 보니 정말 아무나였습니다.

어떤 아무나였는고 하면 이방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입니다.

세리요 창녀인 죄인이지요. 이런 죄인을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어요.

그런데 선택받아 구원받았다는 것을 나의 소유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나 목사하나라는 말에 자손심이 상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당신이 목사답게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 듣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것입니다. 목사답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르게 표현해 봅시다. 성도답다는 것이 어떤 모습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어요.

그 사람도 제가 만일 로만칼라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감히 그런 말을 못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죄인들의 기준이니 성경이 말하는 기준과 다르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 목사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할까요?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 사람의 기준이 이런 기준입니다.

계시를 받지도 않고 자신이 갖고 있는 죄악된 생각을 근거로 목사, 장로, 집사, 교회를 규정짓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런 사람만 그러냐 말입니다.

문제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기준은 어떤 기준일까요?

역시 자신이 아무나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은 특별한 사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가 됩니까? 자신은 결코 아무나가 아니라 자신은 귀중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인간을 귀중하게 만들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됩니다. 특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성령을 주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높아지는 것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차근차근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아무나가 되어야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무나가 아니 되면 나를 위해 예수님이 존재해야 되는 것이지요. 교회도, 성령도, 직분도, 은사도, 어느 것 하나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8절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정말 이상한 이야기 아닙니까?

도대체 사도바울과 로마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자신이 무슨 상관있습니까?

우리는 교육받아 알지요. 성도들은 예수님의 몸의 지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체 흉내 내려고 하지요.

그런데 실제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가 나옵니까?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에 관심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내가 무슨 상관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9절을 보면 항상 바울 자신의 기도에 쉬지 않고 로마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위해 말한다고 합니다.

아직 보지도 못했는데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바울과 로마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들을 위해 이렇게 항상 기도를 합니까?

사도바울은 이들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어떤 신령한 은사를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들을 견고하게 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사도바울이 뭔데 이런 소리를 하느냐 말입니다. 로마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형제도 아니고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일방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로마에 있는 교인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무조건 들어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그리고12절에서는 너희 믿음과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믿음을 보면서 서로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요한복음15장18-19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위로를 받는 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정황이 어떠하다는 것일까요? 오늘날처럼 어렵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만드신 믿음 있는 자를 서로 보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13절에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에 여러분 가고자 했던 것을 로마교인들도 알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길이 막혀서 갈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우린 뭐라고 말할까요? 나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데 당신이 뭔데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하겠다는 것이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에겐 이런 벽이 없어요. 네 교회, 내 교회 개념 자체가 없어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불가능한 말씀들입니다.

사도행전4장32절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성도를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성도 자체가 주님의 것이지요. 그러니 성도에게 속한 모든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내 교회, 네 교회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요.

교회는 오직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밖에 없어요.

또한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합니다.

바울을 이해할 수 없어요. 뭐가 빚졌다는 말입니다.

아마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바울처럼 고백하는 사람 있을까요?

물론 배워서 하는 사람들은 많아요. 그러나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빚 졌다라고 해 버리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 십자가만 앞장세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오직 주님되신 예수님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는 빚진 자의 모습이 아니지요. 빚진 자의 모습이라면 십자가만 자랑해야 하는데 자랑할 것이 왜 그리 많을까요?

마태복음 20장1-16절을 함께 봅시다.

1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온 자들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빚진자의 모습이 아니지요. 아무나가 아니었습니다. 시장터에서 놀고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주인에게 따지는 것이지요.

10절을 보세요.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다나리온씩 받은 지라”

자신들이 빚진자가 아니라 오히려 빚을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빚을 진 자로서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더더욱 이상한 말입니다. 이미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알고 있는데 무슨 복음을 또 전하겠다는 말입니까?

이미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아닙니까?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이들은 복음을 들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복음을 이들에게 전하겠다는 말입니까?

우리 같으면 알아요 다 알아요. 그러니 바울 당신 우리에게 올 필요가 없어요. 다른 곳에 가서나 복음 전하시오. 우리는 알아서 하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목사님 다 알아요. 복음 이미 들었어요. 그러니 당신 우리에게 설교하실 필요 없어요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에 이런 편지를 썼다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는 지도자가 없었을까요? 목사가 없었을까요?

다 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편지를 써서 말하면 편지를 받는 교회 담임 목사들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냥 아멘으로 받아 들여요. 왜냐하면 성령이 사도바울에게도 계시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장26

그러니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이상한 교회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주인이 따로 계세요.

만일 주인이 인간 자기 자신이라면 이런 편지를 쓸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바울은 자신을 예수님 자리에 두게 되겠지요. 또한 로마에 있는 교회도 바울 이야기를 듣지 않겠지요. 바울의 이야기는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고 하겠지요.

오늘날 교회가 그렇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같은 말씀을 보면서도 자기 자신의 교회 세우기에 바쁘지요.

우리교회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돼. 기도할 때 항상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웃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돼. 어떠하든지 복음 전하는 일에 힘써야 돼. 그리고 서로 보면서 피차 위로를 받아야 돼. 우린 다 빚진 자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돼.

이렇게 가르치고 배우고 실천하게 됩니다.

분명 성경말씀을 갖고 이렇게 말을 하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을 통해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살아라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살아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누구를 전하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도바울이나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나 모두가 다 복음에만 관심이 있지요. 물론 그 복음의 내용을 앞서 조금 언급했고, 앞으로 계속해서 그 복음의 내용을 풀어 낼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몸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요.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 몸에만 관심 있지 복음에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별 반응이 없어요. 바울이 로마교인들에게 느낀 그런 감정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바울과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에 동질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십자가만을 전하는 사람을 보면 위로가 되지요. 왜 그럴까요? 믿는 자가 없기 때문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온통 사방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 전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요. 마치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하듯이.

그러면 상대가 예수그리스도의 것이라면 기쁨으로 복음을 받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다 안다고 하면서 나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성도는 빚진 자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 더욱더 복음 전하기를 원하며 전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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