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12 3장9-18

푸른 섬 2012. 12. 9. 17:00

로마서강해 12 3장9-18

우리는 나으냐?




음성

로마서3장9-18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시편51편을 인용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다윗을,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왕 다윗을 끌어다가 사람이란 자체가 죄속에 꼭꼭 가두어져 살아감을 증거물로 제시했습니다. 사람에겐 거짓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다윗의 고백을 통해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 외에 다른 인간들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눈곱만큼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쏟아내는 모든 것이 죄일 뿐이지요.

이와 달리 주님께서는 오히려 죄인 다윗을 주님의 피로 깨끗게 하시고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의로우신 분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판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논리가 맞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들의 논리를 논리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끝내버립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받는 비판은 성령 받은 바울이 당했던 그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예수님의 피와 상관없이 정죄 받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바울을 포함한 예수님의 것으로 부름 받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 그리고 성령 받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자들은 사도바울이 로마서3장1-8절까지 말씀하는 것을 분명 그대로 받겠지요. 그런데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다. 비교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판단입니다. 자신들은 정죄 받는 저들과 다르다라는 판단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만일 자신도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그래 내가 그런 자야 라고 나오겠지요.

그런데 그런 말이 나오지 않고 로마서3장1-8절을 읽으면서 자신은 박수치고 있어요.

너희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옥간다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특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하는 자들이 그 대표적인 자들이지요. 이들은 자신이 죄인인데 저들과 질이 다른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죄인이면 죄인이지 질이 다른 죄인은 또 무슨 소리입니까?

자신들은 이제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구원받은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에게 질문을 한번 해 볼까요?

도대체 어느 말씀을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도 못하면서 기껏해야 정죄 받는 인간들이 내어 놓는 것 외에 없어요. 물론 성경말씀을 지킨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런 태도는 이미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했던 행위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로마서3장1-8절만 읽고 9-18절은 읽지 않는 자들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9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어요.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말씀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읽으니 자신만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방인과 달라, 나는 유대인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무참히 깨어 버리십니다.

9절 끝부분에 보면 우리가 이미 선언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미 로마서 1장에서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라고 선언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가 다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구약을 인용합니다. 시편을 집중적으로 인용하지요.

그런데 이 본문이 누구를 공격하는 구약인용입니까?

9절에서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하는 말에 이 본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10절부터 봅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고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얻도다.

시편14편과 51편의 일부분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14편만 살펴보겠습니다.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가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생들은 모두가 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4절을 보면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어리석은 인생들이 무슨 짓을 하는 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죽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한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괴롭히는 하나님의 백성, 의인의 세대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의인이며, 결국 이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포로 된 곳에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시편14편에 의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피실 때 하나님의 백성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이 어리석은 자임을 확인해 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다면 포로로 잡혀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의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 온 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시편14편과 같은 말씀이지요.

즉 로마서3장10절에 나와 있는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고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는 사실을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이 십자가의 피만 전하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들은 포로로 잡혀갔다고 돌아 왔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이 빠져 버리면 자신들을 포로로 잡아 간 자들만 악한 자들이 되고 자신들은 의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시편14편 말씀이나 53편 말씀이나 로마서3장 말씀과 맞지 않아요.

그다음 13절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시편5편을 봅시다.

5절 6절을 보면 오만한 자, 모든 행악자, 거짓말 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 속이는 자 이들이 누구인고 하면 다윗의 원수랍니다.

이들을 향해 다윗이“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들을 쫓아 내 버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 즉 다윗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고 주를 즐거워한답니다.

결국 자신은 의인이니 복을 주시고 은혜로 자신을 호위하실 것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정작 다윗 자신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바로 목구멍이 열린 무덤인 자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 자로 드러났지 않습니까?

그러니 비록 다윗의 시이지만 다윗을 부인하는 시임을 알 수 있지요.

시편14편이나 53편도 역시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다윗 자신이 어떤 자라 말입니까?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14절입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시편10편을 봅시다.

악한 자가 어떤 자인지 봅시다.

2절을 보면 악한 자는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고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 결국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하는 자. 교만한 얼굴로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

스스로 자신은 절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습니다.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고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졌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라라 합니다. 이들이 곧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시편14편의 한 구절을 인용했지만 시편14편을 모두 담고 있어요.

15-17절입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잠언1:16절을 보면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 이런 자가 악한 자입니다.

이사야59장6-8절입니다.

“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은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사야서가 잠언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고 하면 잠언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시입니다.

이사야59장15-1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인간에겐 정의가 없다. 사람이 없다. 중재자가 없습니다.

18절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시편36편입니다.

1-4절입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비치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의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11,12절을 보면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이 시도 다윗의 시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무언가 알았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여러 시편과 잠언서와 그리고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인간들이 다 거짓됨을 증명합니다.

다시 로마서3장9절 이하로 가 봅시다.

의인은 없다고 했지요. 그리고는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인용된 본문으로 가보면 거기에는 마음, 손, 얼굴이 나오지요.

시편 51편을 인용해서 인간은 다 거짓되다고 했는데 그 거짓된 근거를 9절 이하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이 쪽 본문은 유대인의 문제가 아니라 비방하는 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다 거짓된 인간임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다윗의 시를 대부분 인용했고, 잠언서를 근거한 이사야서를 인용했다는 사실이지요.

다윗의 시를 보게 되면 다윗과 다윗의 원수가 항상 등장합니다. 다윗의 대적자들이 다 악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선한 자가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지금 로마서는 다윗을 어디에 위치시키고 있습니까?

바로 악한 자에 위치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습니까?

우리아의 안내를 범한 사건을 근거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용된 시편과 잠언서, 그리고 이사야서를 찾아보았지요. 그 말씀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다윗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있어서 어느 부분도 악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제대로 증거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비방하는 자들과 비교해서 자신들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선하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로마교인들은 이 싸움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여기 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마음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마음과 또 같은 마음입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누구 뒤에 줄을 서 있습니까?

다윗 뒤에 줄을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오늘 말씀에 자신이 들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무엇으로 살아갈까요? 십자가의 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어떤 성도이든 그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면 자신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다 거짓됩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만이 참됩니다라고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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