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14

푸른 섬 2012. 12. 24. 19:36

약속은 파기 될 수 없다.

로마서4장1-25

1절을 보면 그런즉 이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이 접속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보통 4장 이 부분을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게 사람의 예인 아브라함을 말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그런즉 이라는 접속사는 그러므로 라고 번역해도 괜찮은 번역입니다.

그런즉이라고 번역하면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의 예로 보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접속사를 그러므로 라고 번역을 한다면 4장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지난 주 제가 설교시간에 3장31절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3장 31절 말씀은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이신칭의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율법으로는 절대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로마서를 이신칭의 중심으로 보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고 하면 구원을 챙겨먹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게 됩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지면 예수님의 피는 인간을 의롭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 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시기 위한 피 흘리심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에 중심을 두게 된다면 예수님의 주되심조차도 의롭게 여기심을 받은 자들을 위한 주되심이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율법을 예수님의 피와 바꿔치기 해 버립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심판 아래 있게 한다는 말씀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받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으니 율법을 더 이상 나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이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으면 자신은 어떤 존재가 됩니까? 율법과 상관없으면 자신들 입은 열리고 심판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로운 인간이지요. 그러니 십자가의 피가 이들에게 더 이상 소용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바울이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집어 던진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구약성경을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기는 자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자신은 더 이상 상관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율법을 굳게 세우는 자들이 아니라 율법을 파기하는 자들이지요.

또 한 부류는 율법을 다시 주섬주섬 끌어 모아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이들도 율법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증거한다고 로마서 3장21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덤빕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율법을 파기하는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의 기능은 철저하게 모든 입을 막고 모든 사람들이, 온 세상이 심판아래 있게 하기 위해 주어 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율법은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오직 자기의 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도록 자기 피로 의롭게 된 자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자신들이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얼마나 의로운 자인가를 전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항상 자신들의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만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무슨 행위를 했는가를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다시 4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런즉(앞 내용으로 미루어 뒤 내용의 근거를 짐작해 낼 수 있을 때 쓰여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말 ) 이라는 접속사를 그럼으로( 앞 내용이 뒤 내용의 원인이나 근거가 될 때 쓰여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말)라고 번역을 하게 된다면 아브라함을 어디에 들어갑니까?

율법을 파기하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굳게 세우는 자의 대표자로서 아브라함이 됩니다.

4장 1절에서 그러므로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라고 하시지요.

이 말을 새로운 구절로 보지 않고 앞의 말씀과 연결해 보면 , 육신으로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있지요.

바로 29,30절을 보면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할례자 , 무할례자가 나오지요.

이들은 모두 어디에 속한 자인고 하면 육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즉 육신에 속했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습니까?

2절을 봅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창세기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창세기 까지 가지 않더라도 뒷 구절을 보면 이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어요.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문제 되는 말씀이 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믿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아브라함의 행위입니까 아닙니까? 믿는다는 것도 행위에 포함되지요. 3절 때문에 2절을 해석할 때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배웁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로마서 4장18-21절에서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4,5절을 보면 곧장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가 나와 있어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나니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을 살펴보니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일을 믿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시편32편을 예로 들어서 말씀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움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시편32편으로 가보면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기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 32편을 보게 되면 로마서 말씀과 일치하지 않지요.

이렇게 되면 시편 32편을 읽는 사람들이 오해를 하겠지요.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에는 문제가 없지요. 그런데 2절로 가게 되면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을 때 마치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 조건 절이 될 수 있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지고, 정죄를 당하지 않으려면 마음에 간사함이, 속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이렇게 되면 5절도 이렇게 해석될 수 있지요. 자신이 죄를 자복하고 죄를 아뢰고 숨기지 않으니 주께서 자신의 죄악을 사하셨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죄악을 사함 받는 조건이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주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계세요.

이 말씀도 얼마든지 방금 시편32편처럼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믿음의 성격을 보면 일을 아니할 지라도 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믿는 다는 것이 일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일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믿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4장5절을 다시 봅시다.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일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규정이 되었습니다.

3절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 앞으로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이 규정안에서의 믿음입니다.

그러면서 9절10절로 넘어 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던 시기를 말합니다. 할례시인가 아니면 무할례시인가 라고 말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아브라함에겐 믿음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율법을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11,12절을 봅시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표시라는 말입니다.

12절에서 우리 조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할례 자든지 무할례자든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두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믿음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 오히려 불법을 행하고, 죄만 지었는데 그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가려 주시고, 죄를 인정치 않고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믿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결코 자신이 믿었다는 믿음을 자랑거리로, 행위로 끄집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13절을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이 나옵니다. 이들이 누굽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자와 받을 자들이지요.

13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갑자기 언약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지요. 사실은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약속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율법이 등장합니다.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상속자가 된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14절에서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약속은 파기되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이 말씀이 어디와 병행을 이룹니까?

3장31절에 나오는 율법을 파기하느냐 라는 말과 병행이 됩니다.

율법 파기, 약속 파기. 율법이든, 약속이든 파기 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율법도 굳게 세우고, 약속도 파기 하지 않는 것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지요.

그래서 다시 15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다시 율법의 기능을 말씀하십니다.

율법이 없는 곳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니 범법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온 천지가 죄로 뒤범벅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지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6절을 말씀하십니다. 상속자, 은혜, 믿음이 나옵니다.

상속자가 되는 것은 오직 은혜로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믿음으로 상속자가 되어야 됩니다.

믿음은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을 이룹니다.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거부하는 말씀입니다.

상속자 되는 것이 철저하게 은혜로만 되게 하기 위해서 믿음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 즉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의 조상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믿음의 성격은 이미 우리들이 살펴보았지요.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를 가리어짐을 받는 것이 믿음의 성격이라고 했지요.

아브라함이 믿은 내용을 보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하면서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19-21절을 보면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런데 창세기17장에 보면 사래 이름을 사라 로 바꾸고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로마서 말씀과 완전 정반대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낳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삭과 언약을 세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웃은 이유가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4

사라의 마음이나 아브라함의 마음이나 다르지 않지요. 20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늙은 사라가 그렇게 아름다웠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이삭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어디에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이 나옵니다. 믿음이 나오지요. 나오니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로마서에서 말하는 그러한 믿음을 창세기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찾을 수 없습니까? 육신으로, 샤르크로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안 보여요.

그런데 이전에 믿음의 성격이 어떤 것이라 했습니까?

일하지 않는 자를 , 경건하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는 자, 믿음 없는 자를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백세나 되어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자로 주께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의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이유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을 자들을 위함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24,25절을 봅시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를 아시겠습니까?

믿음의 내용을 보니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이렇게 되면 우리라는 인간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한 일은 범죄한 일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죽인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으신 분이 우리를 의롭다 하기기 위하여 살아 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굳게 세우고, 약속을 굳게 세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이나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얻었다. 내가 그 믿음을 굳게 잡아서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소리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 받지 못한 자입니다.

믿음의 상속자는 자기 백성의 범죄함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자기 백성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여기에 속한 자가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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