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16 5장12-21

푸른 섬 2013. 1. 13. 14:56

로마서강해 16 5장12-21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




음성

로마서5장12-21

어떤 학생이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 난 날 때부터 스물 살이었으면 좋겠어요.

스물 살 이전의 내 인생이 없잖아요.

그래도 이 학생은 스물 살 이후에는 자기 인생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아담이 나오지요.

아담이 누구인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아담에게 아담의 인생이 있었을까요?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그리고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아담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말은 자기의 인생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자기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너무나 잘 아는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아담에게 과연 자기 인생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담을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14절에 보면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모형이라고 해도 되고 예표라 해도 됩니다. 문제는 아담이 살았던 전 인생은 곧 오실 자의 모형으로 살았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보여주기 위해 그 인생이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5장47절에서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하늘에서 나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아담은 땅에서 났습니다.

12절을 보면 한 사람이 등장하죠.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두 사람을 언급하지를 않아요. 아담과 하와라고 하지도 않아요. 아담 안에 하와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한 사람 아담은 죄를 짓기 위해 만들어 졌어요.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죄의 결과로 사망이 들어옵니다. 결국 세상이 사망아래 있게 하기 위해 아담은 만들어 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듣기에 상당히 거북하지요. 이럴 때 나오는 말 있잖아요. 설교 시작때 말씀드린 그 아들의 말처럼, 그럴 것 같으면 왜 사람을 만들었습니까? 라는 불만이 튀어 나오지 않습니까?

12절 하반 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제가 12절 하반절을 미리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범죄한 것과 다른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것과 어떤 관련성이 있습니까?

설명하지 않아요. 단지 12절 하반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자체가 모든 사람이 아담 한 사람 안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지금 로마서는 성령 받은 사람만 알아듣는 말씀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3절에서 갑자기 율법을 또 꺼집어 냅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액면그대로 입니까? 아니지요. 왜냐하면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고 했잖아요. 단지 죄라고 규정할 기준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라”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즉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시기 전까지도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사망이 왕노릇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 무슨 수로 선악과를 따먹겠습니까?

그러나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아도 이들에겐 아담에게와 똑같이 사망이 왕노릇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부터 모세까지도 율법이 없었지만 여전이 무슨 기준으로 이들을 평가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다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이들에게도 여전히 사망이 왕노릇 하는 것을 보니 이들은 죄를 지은자임이 확실함과 동시에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선언됩니다.

13절에서 왜 난데없이 율법을 끄집어 들어간 줄 아시겠지요. 끊임없이 율법을 거론하잖아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한 수 더 뜹니다. 20절에 보면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범죄를 더하게 만들어 결국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아담을 끌고 들어가는 이유는 아담에게 주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도 실제로 율법적 기능으로 아담에게 작용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2장16-17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은 이 말씀대로 행동을 했지요. 아담 마음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었고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 졌을 때 인간들은 아담처럼 똑같이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20절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목적, 하나님께 율법을 주신 목적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말씀을 지키려고 발악을 하지요. 그러니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지요.

정말 낯선 이야기이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지켜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범죄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서5장20절에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이 말씀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한 사람, 즉 아담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런데 14절에서 갑자기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하시지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범죄 이야기 하고 사망이 왕노릇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왜 갑자기 아담은 오실 자, 즉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에 대해 15절부터19절까지 구구절절 말씀하십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5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치 두 가지 은혜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한 가지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딴소리 합니다.

은사와 범죄를 비교하지요.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나 은사, 즉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습니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6

심판은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지요.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는데는 쉽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뒷부분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은사와 많은 범죄와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많은 범죄가 없으면 은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일이 되려면 반드시 많은 범죄가 저질러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라는 말을 단순히 예수님과 대조되는 차원에서 모형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은사를 말하려면 반드시 범죄한 아담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없다면 은사, 선물, 의롭게 되는 것, 영생을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범죄한 아담을 말해야만 제대로 예수님을 증거할수 있습니다. 범죄가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은사가 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이것을 20절에서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는 곳에는 은혜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한다는 말입니다.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죄가 왕노룻하는 것이 드러나는 현장이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현장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7장25절 8장1절에서 그 예를 보여줍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과 후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몸에서 사망이 왕노릇하는 것과 생명이 왕노릇하는 것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20,21절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다고 해 버리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은혜가 없다가 됩니다.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담과 관련된 것, 죄와 관련된 것은 과거로 돌리고 싶을 것입니다.

시제를 보더라고 죄와 관련된 것을 과거로 은사와 관련된 것은 미래시제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을 믿으니 아담과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과거일 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아담은 오실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를까요?

성도는 누구의 증인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 받은 자는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다른 말로하면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만을 전하도록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을 어떻게 전합니까?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아담 자신이 범죄한 죄인으로 제대로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누구를 제대로 전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자신 개인적 자유로 범죄했습니까?

아니지요. 범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반드시 선악과를 따먹어서 범죄하여 사망이 왕노릇 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해서 의가 왕노릇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고, 심판하시는 분임을 알리시기 위한 작업 속에 아담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아담과 동일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죄인으로 삶을 삽니다. 20절 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날마다 범죄를 더하게 되고, 그 죄가 더한 곳에서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을 경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더욱더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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