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18 6장15-23

푸른 섬 2013. 2. 24. 15:00

로마서강해 18 6장15-23

죄로부터 해방, 의에게 종이 됨



음성설교


로마서6장15-23

로마서3장3절을 보면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그 믿지 아니함이 사람은 다 거짓됨을 드러냈고, 오직 하나님만 참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라 선언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죄가 오히려 하나님의 참되심을 증거했으니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또는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고 할 것입니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의 상식이고 논리입니다. 성경적 논리가 이렇게 귀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는 한마디로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끝내 버립니다.

이 말은 더욱더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주신 이유도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3:19).

율법을 주신 것은 더욱더 우리를 하나님백성답게 살게 하려고 주셨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에겐 이 말씀만큼 기분 나쁜 말씀이 없겠지요.

롬3:25-25절을 보겠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최종적으로 자신의 의로우심을 예수님의 피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 이유도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라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분명 자랑 할 데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자신이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5장20절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절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의롭다 하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의 눈에는 이 말씀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에 거하자라는 주장이 튀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만드는 말입니다.

성도는 죄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피만을 증거하며 자랑하며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말씀을 자꾸 행위, 즉 율법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몸과 관련해서 말씀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는 가로 말씀을 접근합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이렇게 복잡하게 기록되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장14절으로 가 봅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죄가 주장한다는 말은 십자가의 피를 믿지 못하는 삶, 즉 자신의 행위를 의지 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죄가 성도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즉 죄가 성도의 왕노릇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성도는 법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반드시 율법과 동반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율법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결코 죄가 성도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죄인들은 반박합니다.

딱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 생각 아닙니까?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되지 않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을 아시겠지요. 법아래 있지 않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법이 없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지요. 어떠한 제약이 없잖아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 말씀이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짓자는 ” 주장입니다.

죄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몸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몸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 졌고 사용되어져야 하는 지에는 관심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몸이 끄는 대로 살 뿐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말씀을 전해 주어도 그 말씀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조차도 자신의 몸이 끄는 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며 살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6장1-14절 말씀이나 오늘 본문 말씀은 오늘날 교회목사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말씀이 아닐까요?

뿐만 아니라 성도라고 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복음을 전해 들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변합니다.

나도 얼마든지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자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이런 태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말씀을 책망의 말씀으로 받지 않습니다. 아니 책망으로 받기는 받아요. 자신이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망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더욱더 노력하고 노력합니다. 율법대로 살아 보려고 말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율법대로 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기존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자고 말입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율법이지요. 그런데 이들은 이 말씀을 율법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산상설교를 신약시대 성도가 살아야할 신앙윤리라고 하지요.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윤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을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고 가르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랑 어찌 그리 닮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순종할 것만 받아 들여서 순종하자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주장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23장23,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서기관 즉 율법 선생들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열심히 했습니다. 완벽히 했지요.

그런데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맹인된 인도자로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짓이 율법선생들과 바리새인이 하는 십일조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18장에 보면 이들의 십일조가 대충 때우는 십일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합니다.

왜 이들의 십일조가 때우는 것이 아닌고 하면 세리의 모습에서 알 수 있지요.

세리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지 못하는 이유,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리새인과 비교에서 나오는 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 끝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래, 바리새인들은 한 가지가 부족했다.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잘했는데 그것을 부인했다면 의롭다 여김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요?

예수님의 말씀도 그런 뜻 같지 않나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성령을 보내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성령 없어도 이런 말은 절에 다니는 자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의 뜻은 바리새인이 한 토색하지 않은것, 불의하지 않은것,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 이레에 두 번 금식한 것, 소득의 십일조 모두가 다 죄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행한 이 모든 것이 죄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합니다. 이유는 말씀대로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죄입니다.

왜 그럴까요? 정성이 부족했을까요?

아니지요. 로마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인간들 입장에서 바리새인을 보면 죄인으로 안 보입니다. 이들이 율법의 말씀을 로마서에서 하시는 말씀처럼 이해했나요.

하지 않았지요.

그러니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을 의롭다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23장23절에 대한 이해도 똑 같지요.

그래, 우린 바리새인처럼 하지 말자, 십일조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함께 해서 드리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바리새인보다 수준 높은 율법준수로 뛰어 들려고 하지요. 그렇게 되면 로마서에 의해 정죄 받습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15절에 나오는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합니다.

그러니 여전히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은 이미 5장12-21절에서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는 세상에 들어 간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6장16절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7-18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과연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 있느냐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없지요. 왜 없습니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백성들에게 만들어 내신 순종입니다.

19절입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함으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 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 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이 말씀을 앞서 살펴본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해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는 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었지요. 즉 자신을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한 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비약을 했지요. 이방인들이 율법과 무슨 관련 있는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로마서는 이방인들을 율법속에 집어넣어 말씀하고 계심을 제가 여러 차례 강조해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이방인들도 바리새인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모습을 오늘날 이방인들인 한국교회에서 그대로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준다는 말은 곧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를 20절에서 말씀하고 있지요.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의에 대하여 자유로운 자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면서 살았지요. 즉 자신이 하나님이 말씀을 순종할 능력이 있고 자격이 있다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바리새인의 모습이 죄의 종으로 살아간 모습입니다. 율법을 지키겠다고 덤비는 것이 바로 의에 대하여 자유로운 모습입니다.

율법을 행한 자신의 모습이 의로운 모습이라고 확신한 모습이 죄의 종노릇하는 모습니다.

21절 봅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이방인들이 행하는 추악, 불의,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교만, 자랑, 부모거역, 우상 숭배 등을 생각할 수 있지요.

이러한 일들을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오면 어떤 식으로 변합니까? 바로 바리새인들처럼 변해 버립니다.

즉 불의 ,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우상숭배 등등이 무엇에 해당되는고 하면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즉 십자가의 피를 믿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가를 드러내는 모습이 이 모습입니다.

22,23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이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마태복음11장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는 곧 예수님의 아버지이시지요.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죄로부터 해방시켜주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이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 열매는 곧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책망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피만이 보이는 자가 주님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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