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20 7장7-25

푸른 섬 2013. 3. 10. 19:01

로마서강해 20 7장7-25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음성설교

로마서7장7-25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싸움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싸움을 싫어해요.

인류역사를 보면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새로운 이름의 나라가 등장했다는 것은 싸움,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물입니다.

지금200개가 넘는 나라가 지구에 있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싸움, 전쟁을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인간은 어떨까요? 언제나 싸울 준비를 하고 있지요.

사실 한국에서 서울대학을 보낼 수 있는 자녀의 수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대학에 입학하려면 최소한 수십만 명을 제거해야 입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입시전쟁이라고 하지요.

부모들은 이 싸움을 뒤에서 조종하고 앞에서 끌어주고 합니다. 물론 여기엔 돈과 시간이 함께 들어갑니다.

요즘은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이 자녀의 대학을 결정한다고 말을 합니다.

돈이 없으면 이 싸움에서 이길 확률이 거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들은 어떻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움을 합니까?

돈은 내가 더 많이 갖게 되면 어느 누군가는 적게 갖게 되든지 모두 잃게 됩니다. 즉 싸움에서 이기는 자만이 더 많은 돈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자녀들은 부모들이 그냥 돈을 버는 줄 알아요. 본인도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분명히 싸움을 해서 이길 때 좋은 성적을 낼수 있지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하고 동기들과도 싸워 이겨야 합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께 우리 딸이 친구생일파티 초대를 받았어요. 그런데 초대받지 못한 친구들이 있어요. 초대받은 친구들은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초대받지 못한 친구들은 기분이 나빠요.

왜 기분이 좋고 나쁠까요?

자신이 승리자이고 자신이 패배자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은 싸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즉 승리자가 되기 위해 싸움을 늘 하고 살아갑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싸움꾼입니다.

무소유를 외치는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은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겸손을 외치는 자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렇게 싸움꾼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성경말씀을 통해 싸움을 하라는 소리는 싫어합니다.

오늘 본문7절을 앞부분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이 말이 튀어 나온다는 말입니다.

7장6절까지 로마서를 읽어 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율법이 죄다라고 외칠 여지가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첫째 아담을 닮은 자들은 손가락을 항상 자신이 아닌 것으로 향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정도 이야기 했으면 죄인입니다. 불쌍히 주옵소서라고 나와야 하는데, 율법이 문제야 라고 하는 자들이 꼭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제는 아주 노골적으로 율법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 설명합니다.

7절 중간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지금까지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설명하니 듣는 상대가 못 알아 들어요. 꼭 여기 있는 우리 같아요.

제가 설교할 때 마다 한국교회이야기하고, 한국교회 목사, 장로, 집사, 교인들을 공격하지요.

그러면 제 설교를 듣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정 목사는 왜 자꾸 한국교회 비판하고, 목사 비판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이런 소리 목사들에게 참 많이 들었어요. 근데 제가 공격하는 것이 단순히 그들에 대한 공격입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임을 말하고 있는데 저들은 자기 자신을 볼 줄 몰라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지금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도 똑 같아요.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사용해서 말을 하니까 상대가 말끼를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사도바울 자신에게 율법을 적용할 때 자신의 몸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다른 말로 하면 성도가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자기 몸에서 적용되어 일어나는가를 설명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사도바울이 누굽니까?

예수님 만난 사람 아닙니까?

그뿐만 아니라 성령충만받은 사람이지요. 그런 사도바울에게 율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직접 예를 들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7절 하반절입니다.

사도바울의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였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탐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어떤 모습입니까?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탐심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 왔습니다.

정말 놀라운 반전이지요. 이 말씀은 성령 충만한 ,계시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이 한 말입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이고요. 주님의 영이 임한 사도바울은 탐내지 말라는 율법의 말씀이 과거에는 탐내지 않아야 한다고 배우고 지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탐내지 말라는 율법은 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율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내지 말라는 율법말씀이 없었다면 자신은 탐심을 결코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성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사도바울이 미친자라 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을 이렇게 적용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 교인들이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바울 자신이 탐심을 알게 하였는가?

8절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이 말씀을 알아 들었나요?

9절을 봅시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8절 말씀은 9절 말씀과 함께 봐야 이해가 됩니다.

즉 지금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율법을 깨달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율법을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나니까 율법이 깨달아 졌습니다. 즉 믿어졌다는 말입니다.

즉 성령받기 전에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자신은 율법을 깨닫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후 진짜 율법을 깨닫게 되니 죄가 살아나고 자신은 죽은 자임을 믿게 됩니다.

즉 죄가 살았다는 말은 자신은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성령받기 전에는 율법을 깨닫지 못했고 그때에는 자신은 살아 있다고 믿고 살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령 받으니 정작 자신은 죽은 자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자기 몸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는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이 내용은 사도바울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체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인간들의 온갖 탐심들을 한 곳에 모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자를 핍박했지요. 성령받기 전에는 이것이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것이 죄임이 알게 되었습니다.

계명이 이르매, 표현이 재미있지요. 성령을 통해 계명을 사도바울에게 도착하게 하니까, 즉 제대로 적용시키니 살아나는 것은 죄 밖에 없고, 자신은 죽은 자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사도바울 자신에게 계명은 어떤 기능, 역할을 했습니까?

10절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이것이 바로 성령을 제대로 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 자는 성령 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어떻게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 계명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것은 저들이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지 않습니까?

성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이 주장 아닙니까?

그런데 성령충만받은 사도바울, 계시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 자신에게 오히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라고 고백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11절을 말씀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역시 성령 받은 자가 하는 고백입니다.

자신은 속은 자고 자신은 죽임을 당한 자라고 고백하지요. 여기에서 자신은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주체는 죄였습니다. 죄가 계명을 가지고 사도바울을 속였습니다. 또한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을 죽은 자로 만들었습니다.

속임을 당했다는 것과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함께 함유한 자가 성령 받은 자입니다.

속은 경험이 있습니까? 죽임을 당했습니까?

그렇다면 성도입니다.

즉 자신이 죄의 종노릇하는 인생임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12절을 말씀합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문제는 율법이었습니까? 계명이었습니까? 율법도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

문제는 사도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죄의 종노룻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율법은 사도바울을 죽은 자로, 죄인으로 만드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율법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14절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참으로 표현이 재미있지요.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바울 자신을 적용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할 줄 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누구를 말합니까?

일차적으로 로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 모든 성도를 말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도 율법은 신령한 줄 알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습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팔렸으니 죄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사도바울이 그러하다면 성도들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입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아래 팔린 자입니다.

그러니 15절을 말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죄의 종이니 자신이 하고싶은대로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어요.

자신이 행하는 것을 자신이 알지 못해요. 마음대로 안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합니다.

16절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즉 자신은 죄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즉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죄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또 문제는 죄로 돌려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은 속 빠져 버리고.

그래서 18절을 말씀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즉 자신의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원함이 있어도 선을 행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곧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즉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 증거로.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은 상태를 말합니다. 성도의 상태를 말하지요. 모든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성도 아닌자는 믿지 못하지요. 수용불가입니다.

기분 나쁜 소리로 밖에 안 들립니다.

그리고 다시 20절에서 자신이 죄의 종임을 말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죄의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죄의 종이라는 말에 중점을 두시기 바랍니다.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게 죄의 종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22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성도는 자신이 죄의 종임을 이렇게 목격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있는 상태에서, 즉 율법이 있는 상태에서.

그래서 24절이 터져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곧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뒷부분은 23절을 다시 말하는 것입니다. “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율법을 보면서, 즉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보면서 탄식이 터져 나오면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외치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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