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22 로마서8장12-17

푸른 섬 2013. 3. 24. 18:07

 

로마서강해 22 8장12-17

양자의 영을 받은 자의 고난


음성설교

로마서8장12-17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은 기쁜 소식인데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일까요? 이 땅에 사는 첫째 아담의 후손들은 복음이 누구에게나, 즉 자기에게만은 반드시 기쁜 소식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못합니다.

우상을 만들어 그 우상을 섬기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일체지시가 없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있을 뿐입니다. 이런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자신이 하나님같이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신 외에 참 신이 어디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입을 굳게 다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지요. 그냥 말씀하시고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라는 것이 그냥 말이 아니라 말씀대로 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뜻은 십자가 안에서 자기 백성은 죄 용서 하여 구원하시고, 그 십자가 안에서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심판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백성은 십자가를 근거로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십자가를 근거로 지옥 보내십니다.

마태복음1장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에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빌려왔으면 그대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로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라고 뜻을 알려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고 하면 세상사람 누구나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기 백성이 되어 버리면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백성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기 자기 백성,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에만 관심을 두시지요. 즉 아들의 소원대로 부름을 받은 자만 구원시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버지하나님께서 아들 되신 예수님께 보내주신자 만 구원하십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은 복음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에 해당사항도 없으면서 자신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 설교를 읽고 어떤 분이 하나님의 은혜도 없고 사랑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의 사랑을 받는 자만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가 그렇습니다. 자기 백성 아닌자는 철저하게 골라내어 버립니다.

로마서를 읽으면서 아멘할 사람은 예수님백성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누가 만들어 냅니까?

예수님께서 만드셨지요. 성령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해 버립니다.

왜 그리스도의 영입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이시니 당연히 그리스도 만을 전하지요. 다른 것을 전하거나 말하는 자는 악령들린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합니까? 철저하게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자로 드러납니다. 이런 모습이 성령이 거하는 자의 모습니다.

성령께서 끊임없이 죽이시고 살리시는 작업을 펼치시는 장이 성도의 육입니다.

늘 죽을 몸으로 드러나지만 늘 살려내시는 성령으로 인해 성도는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2절로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참 한글이 어려워요.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이나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풀어 주니 쉽지요.

지금까지 로마서 말씀을 보면 성도가 누구에게 빚을 졌습니까? 육신에 빚을 졌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왜 12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인간의 본능이 육신에 빚을 진자처럼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봅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사도바울이 말한 7장의 내용은 육신대로 사는 것입니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사도바울이 말한 정반대의 삶이 육신대로 사는 삶이지요. 즉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는 그 삶의 방식이 바로 육신대로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빌립보서 3장5-6절입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것이 바로 육신대로 사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혈통입니다. 즉 자신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율법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 만만하게 말하지요.

지금 로마서를 읽는 자들은 이방인이기에 혈통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여전이 이 문제에도 이방인들이 걸려듭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혈통인 이스라엘을 언급하는 것은 이방인교회가 이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대하는 것과 똑 같지요.

또 하나는 율법입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사는 것이야 말로 육신대로 사는 자입니다.

이 두 종류의 자랑거리는 첫째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들에게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요. 나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요. 그러니 나는 천국갈수 있어요.

이게 누구의 모습니까? 유대인들의 모습이지요. 특히 바리새인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누구에게 나타난다고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요.

그러나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나는 예수님을 믿어요. 나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요. 그러니 나는 천국갈수 있어요.

이런 소리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지요. 곤고한 자라고 하지요. 그리고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하지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자신이 어느 자리에 있어요. 죄인의 자리에 있어요.

이것은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목사들이 쇼하는 그런 것 아닙니다.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자의 모습니다. 몇월 며칠에 구원받았습니까? 이런 소리 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구원은 자신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주님을 전하기 위한 구원입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자신은 죄인으로 드러나는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알고 있지요. 육신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알고 있나요? 알고 있어야 성도에요.

성도 아닌자는 그렇게 사는 것이 육신으로 사는 것인 줄 꿈에도 생각 못해요. 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나는 예수님 믿어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요. 예수님 사랑 받았어요. 예수님 사랑 알아요. 이런 소리 하는 겁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사도 바울처럼 드러나는 모습이야 말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모습니다.

로마서7장9절에서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율법을 깨닫지 못했어요. 지키려고했고 지켰지요. 그래서 흠없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게 되니 계명이 비로소 자신에게 도착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죄인으로 드러나고 자신은 죽은 자, 즉 곤고한 자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모습이 영이 몸의 행실을 죽이시는 모습입니다.

13절을 육에 속한 자들이 읽으면 이렇게 해석할겁니다.

"그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지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 그러니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자"

여기에 말씀하시는 영이 누구 집 강아지 이름입니까? 성령이 우리 소유입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죄인이라고 이야기해도 ,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씀도 이렇게 해석할겁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자라고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 즉 그리스도의 영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15절에서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주님께서 양자의 영을 주셨다고 하시지요.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어 있지요.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앞서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15절에도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양자의 영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상당히 중요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우리 성도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앉는 사람도 있어요.

여기에서 양자의 영이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라고 말씀하시지요.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빠라는 단어와 부르짖느니라 술어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아빠라는 단어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가 그냥 기도가 아니라 부르짖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기도로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곤고한 사람이 나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한 후에 성령을 말씀하시다가 왜 부르짖는 기도로 넘어가는가 말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입니다. 그런데 15절 앞부분에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즉 성도는 악마의 영을 받는 자가 아니라 무서워하지 않는 두려움 없는 영을 받았습니다.

요한1서4장18절입니다.

“ 이로서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에 성도에게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성령 받았습니다. 그러니 심판 날에 담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심판 날에만 담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십자가 지셨듯이 성도도 이 세상에서 두려움 없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면 로마서에서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이 복음을 전하게 되면 어떤 일이 닥친다는 말씀입니까?

고난이 닥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6장9-10절을 봅시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에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인가 하니”

이미 성도가 부르짖는 내용까지도 이미 결정 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가 성도개인의 부르짖음이라는 열 명이면 열 가지, 스무 명이면 스무 가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그 기도는 결국 계시록 6장에 나오는 부르짖음으로 통일됩니다.

성령께서 철저하게 우리의 영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그 모습이 7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딴 생각하지 마세요.

성경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사용한 용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의 영을 찾아보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 한 다른 법, 이것을 지켜보는 나. 이 자체가 사도바울의 영이 됩니다.

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을 말씀합니다.

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이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앞서서 언급했습니다 마는 양자라는 표현,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하니까 미친 사람이 생겨요. 자기도 그리스도와 동급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지요.

이 말씀은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분명 양자인 것은 확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인 것도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지요.

지금 성도들은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분명 성령으로 양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육신으로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사는데 고난을 받느냐?

간단하지요. 그리스도께서 왜 고난 받으셨습니까? 육신대로 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을 아멘으로 받는 자들은 양자의 영을 받아서 부르짖을 일만 생겨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 자된 기쁨이 있지만 그 기쁨은 반드시 고난과 함께 오는 기쁨이 됩니다.

사도바울이 왜 갑자기 고난을 언급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성도는 그리스도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의 피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5장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환난이 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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