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31 10장10-15

푸른 섬 2013. 5. 27. 23:00

로마서강해 31 10장10-15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음성설교

로마서10장10-15

제가 그저께 배드민턴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해서 토너먼트 경기를 가졌습니다. 저도 참가 신청을 해서 참가했지요. 물론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습니다 마는.

그런데 경기는 반드시 지는 사람이 있고 이기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이런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이 경기에 지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문제는 경기를 재미로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미로 야구도 보고, 재미로 축구를 보지만 국가대표경기를 하거나 아니면 자국민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를 보면 누굴 응원합니까?

그리고 경기에 지고 나면 어떻습니까?

괜히 기분 나쁘고 짜증나지요.

육에 속한 인간들은 이것을 못 벗어납니다. 특히 구원과 관련 되었다면 더더욱 그렇지요. 자신만은 구원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 자신이 확정되었다면 자신의 가족이 , 민족이 , 국가가 구원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성경에서는 탐심이라고 합니다.

탐욕이 가득한 인간들은 구원, 즉 천국 가는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신 것을 이들은 자신의 구원욕구채우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구원하신 백성은 이런 탐욕이 가득한 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드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이지요.

그는 오히려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혈통이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자신이 역할, 즉 자신이 받은 사명과 관련지어 하는 말입니다.

즉 성도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혈통이 구원 얻는데 사력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구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인간의 탐욕을 더더욱 자극하는 말씀으로 들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초점이 가 있음을 오히려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본문 10절을 보면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 이유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지난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을 누가 인정할까요?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몰라요?

제가 베드미턴 경기를 하기 전에는 제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잘 몰라요. 그런데 막상 경기를 해보면 내가 이겨야 한다는 당위성만 가득 차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자신들의 전심과 실제로 나타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다짐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오시기 전 까지는 자신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니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자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의 영을 주셔야만 가능하지요.

이 말씀은 이미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말씀은 성령의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모습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인간들이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나 그 흉내 냄은 반드시 들통 납니다.

11절에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우린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럽지 않나요? 이런 과학시대에, 이런 물질 만능 시대에, 황당하게 예수님의 피를 믿고 전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까?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말씀을 알려면 거꾸로 보면 됩니다.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안돼요. 오늘날 이 시대는 돈으로 다 설명이 되니 말입니다.

자기 이름을 낼수 없어요. 자기 이름은 죄인으로만 드러날 뿐입니다. 아무리 수고하며 땀을 흘려도, 자신이 한 일이 없어요. 모든 것이 주님 홀로 다 하셨다는 것을 전해요.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누가 믿겠어요.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도바울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자기 생명이 끊어져도 자기 혈통, 물론 이방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구원 얻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신이 한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모든 일이 주님이 하신일이에요. 그러니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보기엔 조롱밖에 더 하겠습니까?

사도바울 당신이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해도 자신이 한 일이 없데요. 누가 봐도 사도바울이 다 했는데.

그런데 사도바울 눈에는 누가 보여요. 주님이 보여요. 하늘 우편에 계신 주님이 보여요.

그는 믿음으로 살아요. 그러니 믿음 없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뭔가 내세울게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면 기분 좋을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 유대인만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면 헬라인은 기분 안나쁠가요?

상상해 보세요. 로마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합니까?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 말은 유대인들도 기분 나쁜 말이고 헬라인들도, 즉 로마인들도 기분 나쁜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셔서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그를 부를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미 로마서 앞부분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오히려 죄를 범하는 자로 드러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의 이름을 부를 자 없다고 선언해 놓고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나요.

그야 9장에서 말씀하셨지요. 주께서 원하시는 자,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자만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런 자들에겐 주님께서 부요하십니다. 이들에게 넉넉한 구원을 주시지요.

문제는 이 말씀을 누가 믿을 수 있는 가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받은 사람만 이 말씀에 아멘 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있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어도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십니다. 천국갈 확신이 있는 자들은 오히려 지옥보내신다고 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인간 구원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들이 사용하지 말아야 하나요. 그렇지는 않지요. 사용해야 하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오히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음을 알려 주는 말씀으로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지요.

그러면서 14,15절을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 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해 오고 있었습니까?

구원이야기를 해 오고 있었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또 옆으로 빠져버립니다.

로마서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지금 누구를 아름답다고 합니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하지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를 또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전도에 미쳐버립니다.

이것을 목사들이 이용하고 또 이용하지요.

성경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전도하자. 전도하는 발이 아름답다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가를 봅시다.

믿지 아니하는 일을 어찌 부르겠는가? 그렇다면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겠느냐? 들어야 믿지요. 그렇다면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전파하는 자를 보내신 분이 없으면 어찌 전파하겠습니까?

그래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라고 하십니다.

결국 전도는 누가 하셨습니까? 보내신 분이 전파하는 자를 보내셔서 전하고 믿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만들어 내는 흔적들은 모두가 다 누구의 흔적입니까?

사도바울의 흔적입니까? 아니지요. 주님의 흔적이지요.

그래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주목받고 싶고, 내가 승리하고 싶고,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잖아요.

그래서 구원을 말씀해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씀해도 항상 자신이 주인공 되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주님이 하시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고 해 버리면 삐져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왜 복음을 전합니까라고 해 버려요.

사도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혈통 이스라엘이 구원 얻기를 바란다고 했지요. 그런데 구원은 누가 하십니까. 주님 마음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의 걸음 걸음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반항을 하겠지요. 그렇다면 제가 왜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네가 복음 전하라고 하신 적이 없어요.

전하라고 하신적도 없는데 인간들이 이렇게 반항합니다.

주님의 일은 지금까지 주님 홀로 다 해 오셨습니다.

구원받는 자들도 주님께서 홀로 하신 작품입니다. 전하는 자들도 주님께서 만드신 작품들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내가 전도해야 한다. 내가 전도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라는 말이 왜 튀어 나옵니까?

성도를 부르시는 것은 주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를 통해 주님께서 일하심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남기고 싶어서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만드신 주님의 백성은 자신이 살아가는 흔적들 속에 주님께서 일하심을 전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칭송을 받는 자로 살아가지요. 실은 주님자신의 일입니다마는.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행한 일이 있다면 이 땅 사람들은 절대로 그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 버리면, 자신은 죄인으로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요.

그래서 우리들도 타인들이 나를 좋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형태의 삶을 꿈꾸지 않나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아요. 그러면 주님으로부터는 어떻게 될까요?

누가복음6장26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예수님께서 하필 예를 들어도 이런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

이들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말을 합니다. 물론 행동도 그러하겠지요.

반대로 말하면 참 선지자는 어떠할까요?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고 욕합니다.

그분이 누굽니까? 바로 주님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해진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교회는 이런 꿈을 꾸는 자들이 가득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꿈.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발부둥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코 이런 자들이 발이 아름답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자신들이 행한 일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증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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