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29 9장30-33

푸른 섬 2013. 5. 12. 13:06

 

로마서강해 29 9장30-33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음성설교

로마서9장30-33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받지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답변을 합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답변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에서 답변을 하고 있지요.

사도행전16장30절에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바울에게 한 질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절에서는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 말씀에 의하면 분면 구원을 받으려면 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믿어야 합니까?

간수가 믿어야 구원을 받지요. 간수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면 본문으로 와서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게 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분명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이 의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 당시, 사도바울당시 유대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접근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생각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유대인들이 의를 따르는 것과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 줄 생각해요. 특히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을 얻은 것처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30절에서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해 볼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라고 질문을 할 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구원을 받았지요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신앙을 갖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 신앙이 잘못되었습니까? 의가 아닙니까? 의가 아니지요.

그러면 사도행전16장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잘못되었습니까?

아니지요.

빌립보서 16장을 보면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울 차꼬에 든든히 채웠습니다.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러니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하나님 찬송소리를 듣는 자들이 있겠지요. 그들이 누굴까요?

간수일까요? 아닙니다. 바울과 실라가 깊은 옥에 가두어졌잖아요.

그 깊은 옥에 들어가서 간수가 지킬까요? 아니겠지요.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소리를 들은 자들은 함께 갇힌 죄수둘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발에 찬 차꼬만 벗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죄수들의 차꼬도 벗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 상황은 뻔 하겠지요. 죄수들이 도망쳤다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합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로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이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누굽니까? 바울과 실라입니까? 아닙니다. 바울과 실라 뿐만 아니라 바울과 실라의 기도소리와 찬송소리를 들은 죄수들 뿐 아니라 감옥에 갇힌 모든 죄수들이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조수들은 자신들의 차꼬가 벗어져도, 옥문이 열려도 도망갈 수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바울과 실라 때문에. 아닙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구원받아야 하는 간수 때문입니다.

차꼬는 풀어 놓고 도망은 못가게 하고.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하며, 이 말씀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지요. 그런데 이 간수가 책임자였던 모양입니다. 성경에는 등불을 준 사람에 대해선 관심도 없어요.

간수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갑니다. 그리고 묻는 질문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하지요.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스스로 죽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 그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뿐이 누군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간수는 자신의 상관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죽을 바에는 내가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은 죽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옥문이 열린 상태, 착꼬가 벗어진 상황을 목격한 상황에서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은 바울과 실라가 믿는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다른 죄수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른 간수들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소리를 직접 들은 죄수들이 구원받은 이야기는 없어요.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와 찬송 소리를 듣지 못한 간수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물론 다음날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를 놓아주라는 명이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간수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일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었지요.

함께 기적으로 목격한 죄수들, 다른 간수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들의 입에서는 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갈급함이 나오지 않았나요?

사도행전16장을 19절 이하를 보게 되면 주께서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일을 진행시키시는 지를 보여줍니다.

빌립보에 귀신들이 여종으로 인해 큰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인 여종이 바울일행을 따라 다니면서 귀찮게 합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이렇게 되면 그 곳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다 알려졌겠지요.

그런데 여러 날을 이렇게 하니 바울이 심히 괴로웠습니다. 우리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 귀신 너 제대로 말하는 구나라고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누군지 누구나 인정하는 귀신들린 여종이 말해 준다면 복음 전하기가 더 쉬울 것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몇일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그러니 바울이 너무너무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 버립니다. 여기에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본문을 보게 되면 여종이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귀신들린 상황이었지요. 요즘도 이런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고 하지요. 주님께서 사람들의 인식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종을 멀쩡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귀신이 나갔다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귀신이 나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여종이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주님의 종이 되었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루디아의 집으로 함께 가지도 않았습니다. 간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돈 을 못벌게 된 주인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이들을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옷이 찢어지고 매로 맞았습니다. 많은 맞은 후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뭐라고 했습니까?

바울일행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을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로 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을 믿었습니까 믿지 않았습니까?

믿지 않았어요.

간수도 이 정도는 들었겠지요. 그런데 왜 곧장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요?

간수가 되었든 빌립보 시민이 되었든 복음을 듣는다고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벌이셨습니까?

귀신들린 여종을 이용해서 바울을 괴롭히고, 바울이 그 괴롭힘을 못 견뎌서 귀신을 쫓아내 버립니다.

그리고는 거짓고소로 옷이 찢기고 매를 맞아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도와 찬송을 하셨고, 이런 중에 큰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착꼬가 벗어졌습니다.

한명의 죄수도 도방하지 않았고 간수는 자결하려는 상황에서 바울이 크게 소리 질서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질문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의 관심은 늘 구원받은 간수에게 있습니다. 성경도 간수를 주인공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지요.

그런데 본문을 우리들이 살펴보니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본문에 나옵니다. 그들도 똑 같은 경험을 했지만 왜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까?

간수처럼 질문을 하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간수는 질문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아니지요.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을 빼버립니다.

오히려 구원 얻을 조건에 있어서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소리를 들은 죄수들, 이들은 옥문이 열리는 것을 목격했고, 자신들의 착꼬가 벗어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탈출하지 않은 것도 경험했지요.

그런데 이들에겐 구원은 상관없습니다.

로마서 9장 30절에서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며 라는 말씀이 사도행전 16장에서 그래도 적용이 됩니다.

간수는 의를 따르는 자가 아니었습니까?

자신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먼저 질문하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게 하셨지요. 더욱 중요한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주 예수라는 말씀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겠다는 의지자체를 다 깨어버리는 분입니다.

그것 자체가 죄라고 정죄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합니다

. 따라서 예수님을 만나니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질문을 갖고 찾아오는 자에게 넌 지옥가야 마땅한 자야라고 하시니 예수님을 가만히 놓아두겠습니까?

오늘날도 똑 같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은 너희들은 죄인이야. 지옥가야 마땅해 라고 하시면서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그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 방법대로 행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선교사가고, 별별 짓을 다하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 구원받을 수 있지요 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피해가 버립니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이 구원을 얻도록 해 버립니다. 참으로 간단하지요. 이렇게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나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의를 따른다고 우길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의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이 구원을 얻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난 의를 받은 자들에게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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