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27 로마서 9장14-18

푸른 섬 2013. 4. 29. 21:11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로마서9장14-18

9장5절을 보면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 이시니라 아멘”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로부터 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지요. 그리스도가 중요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언급하면서 빠질 수 없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라고 하셨습니까? 만물 위에 계셔서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라고 하시지요.

만물 위에 계신 분 곧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만물 속에 포함됩니까 포함되지 않습니까? 포함되지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존재했고, 만물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까?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만이 유일한 약속의 자녀임을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16절을 봅시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로마서 말씀과 상당히 다르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로마서에서는 마치 구원받는 성도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의 자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로마서 9장12절에 나오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과 13절에 나오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다는 말씀을 곧장 성도들에게 적용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런데 우리의 욕망이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아닙니까? 구원 말입니다.

구원받는데 미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말씀을 꼭 자기에게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말씀은 오직 한 가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만물위에 계셔서 세세토록 찬양받으실 분입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과 에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즉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분이 하실 일을 보여주는 역할을 야곱과 에서가 했지요.

택하심을 따라 사랑받은 자와 미움 받는 자가 결정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결정되어 버렸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결정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태어나서 아무리 자신이 무슨 행위를 하더라도 이들이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피 능력 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 속에 예수님의 피를 증거합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받음은 야곱의 행위와 상관없이 , 여기에서 행위와 상관없다는 말은 곧 야곱이 죄인으로서 예수님의 피로 사랑받았습니다.

에서는 어떻습니까? 그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와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인 자로서 그의 인생은 결정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혈육이 구원받기를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전 이 말씀에 의하면 이 마음도 결국 무엇으로 드러날까요?

죄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사도바울은 빠져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이 자신이 한 말과 정 반대되는 말씀을 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누구를 말씀하실까요?

뒤 구절을 보면 구약의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라고 했지요. 로마서에서 나오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지요. 물론 성도도 알겠지요.

사람들이 이런 말씀들을 다른 마음으로 대합니다.

분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른 하나님을 자꾸 생각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하나님, 즉 구약의 하나님을 떠올리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 하나님이 지금 누구시라고 하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불의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적 언어로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이 구약사람들이 아니지요. 그러니 이 말씀이 이들에겐 어떻게 들려지겠습니까? 분명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 즉 택하심을 입은 자와 있지 못한 자를 골라 내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아무리 사도바울이 긍휼히 여겨도 소용이 있습니까 업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불쌍히 여겨도 아무런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구원을 하십니다.

16절을 봅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은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

바로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아무리 달음박질해도 어느 누구도 구원시킬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이 기도하고 , 말씀보고, 구원해달라고 간구해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곧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을 봅시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지요.

바로를 왜 세웠습니까?

즉 사도바울을 핍박하는 자들을 왜 세웠습니까?

다르게 표현하면 사도바울이 혈통적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도바울을 핍박하는 자들이 왜 생겼습니까?

저절로 생겼습니까? 자신들이 분을 내고 싶어서 냅니까? 절대 아닙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한다고 생각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전했는데 믿지 않는 자들이 있지요. 이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떻게 전한다는 말입니까?

구원을 누가 시켰습니까? 주님 되신 예수님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믿지 않게 했습니까?

역시 주님입니다.

18절을 봅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약하게 하시느니라.

세상에 어느 누가 이런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니 별로 와 닿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완악하게, 악하게 하려고 하는 자를 악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소극적이 아니라 상당히 적극적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의 손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뭔가 하나님을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마서를 보니 인간들은 죄인으로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시고 만들어 놓으신 상황에서 긍휼히 여길 자를 만들어 내시고 완악한 자를 만들어 내십니다.

로마서를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도바울이 정신병자로밖에 안 보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얻기를 그렇게 원한다고 해 놓고, 자신의 소원과 상관없이 주님께서 홀로 구원받을 자, 지옥갈자를 직접 관리하신다고 말을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해야지요. 주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와 지옥 가는 자를 친히 만들어 내시니 믿자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할 일이 없고 오직 믿으면 된다고, 아니 믿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되니 그냥 되는대로 살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성경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곳이 없습니다.

꼭 성령을 따라 살아라고 하고 오히려 사도바울은 더욱적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지요.

그러니 인간들은 이 두 가지 상반되는 내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안절부절 하지요.

그래서 한쪽은 주님께서 홀로 다 하신다는 것을 제거합니다. 말은 믿는다고 하지요. 그러니 땅에 나타나는 것은 사람의 행위 밖에 없으니 우리들도 사도바울처럼 살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본 받자라고 하고, 예수님을 닮자라고 합니다.

또 한 부류는 주님 홀로 다하니 내 마음대로 살자라고 하는 부류가 있어요. 사실 이런 부류도 앞 부류와 똑 같습니다. 어찌되었던 자기 몸 중심으로 행위를 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로마서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주님께서 일을 직접 하십니다. 직접 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사도바울이 하고 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주님께서 흘리신 피를 중심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를 온몸으로 전하는 자로 사도바울을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 얻기를 바란다는 것은 곧 이들 속에서 반드시 주님을 드러내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지옥 보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야 당연히 구원받기를 바라겠지요. 어느 누가 지옥가라고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지옥가라고 복음 전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 놀랍께도 그 복음, 영생으로 인도하신 십자가 복음이 어떤 역할을 합니까?

긍휼히 여길 자와 강팍게 할자를 만드시는 주님이 일하시는 현장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들 중에 어느 누고 자기 민족애를 갖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어느 누가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가 있을까요? 이들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전한 복음이 주님을 제대로 증거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말씀앞에 오히려 죄인으로 드러나는 현장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복음 증거를 통해 찬양을 받으실 주님, 긍휼히 여길자와 강팍하게 만들어 지옥보내시는 주님을 제대로 전합니다.

성도의 관심은 자기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민족의 구원도 아닙니다. 자기 가족 구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구원, 자기 민족 구원, 자기 가족 구원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소원이지요. 이런 소원을 통해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피 복음이 이 모든 것을 깨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전합니다.

복음 전파라는 것인 뭔가 거룩한 욕심으로 되어지는 줄 아는 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 죄인을 그대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인과 복음이 함께 나타나는 현장이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만 타나나는 현장을 원하지요. 자신이 거룩한 자로 드러나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이런 자들은 주님의 증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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