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26 9장1-13

푸른 섬 2013. 4. 21. 12:46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음성설교

로마서9장1-13

8장 33-34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이 듣기에 기분이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기분이 좋지요.

그런데 이런 기분 좋은 생각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구원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9장6-7절을 봅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폐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녀지요. 그러나 이스마엘을 통해서 난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로 불린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8장33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것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답변입니다.

곧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씨로서 당연히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 앞에 누가 나타나더라도 자신들을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자야 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아니면 메시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도 자신들을 지지해 주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이 오시어 자신들을 인정해 주기는커녕 자신들을 마귀새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이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을 가로막는 자는 자신들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행위, 즉 율법대로 하는 행위라 생각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절에 사도바울 자신이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했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교회,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들, 성도를 박해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율법대로 행하는 참으로 의로운 행위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인 사도바울이 이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도 이와 동일한 생각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신들 편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이런 행동은 그들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런 자들이 무슨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씀을 믿었던 자들입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임을 이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이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긴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말씀이 폐해진 것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렇다면 8장39절 말씀도 믿을 수 없는 말씀이 되어 버리잖아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9장에서 사도바울이 느닷없이 이스라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1-3절을 읽어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지금 사도바울이 이스라엘 때문에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하지요.

특히 3절을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무엇을 원한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을 보면 누가 떠오릅니까? 모세지요. 물론 예수님도 떠오르고 스데반 집사님도 떠오르지요.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산에 올라가 여호와께로부터 십계명 돌판을 받는 상황에서 땅 아래에서는 아론을 앞잡이로 내세워 자신들의 정성을 가득 담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황금송아지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자신들의 정성과 노력과 눈에 보이는 신을 이들은 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갖고 내려 왔지요. 십계명 돌판에 새겨진 율법에 의하면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모두 심판받아 죽어야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돌판을 깨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속죄물로 내어 놓습니다.

3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데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물론 여호와께서 이들의 죄를 반드시 보응하셨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기도로 이들은 약속을 땅을 향해 가게 됩니다.

자 이렇게 보면 사도바울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모세와 동일한 심정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피조불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 그 피조물 중에는 당사자가 포함되어있지요.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고 끊어지지 않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루어 내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갖겠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내가 전도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복음을 전해보면 이런 말을 많이 들어요. 주님이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 꼭 하는 말이 그러면 전도할 이유도 없고, 내가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고 반문을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사도바울은 운전을 하다가 급회전을 하듯이 갑자기 자기 혈통이야기를 꺼집어 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과 주님의 기도가 있는 자들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요? 바로 주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모세는 주님 되신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누가복음23장34절을 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시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이 기도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까? 내 적용이 됩니다. 어떤 식으로 적용됩니까?

주님의 백성들은 죄용서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 아닌 자들은 이 기도가 피해 가 버립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온 주님의 기도가 바로 이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 그가 돌에 맞아 죽을 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스데반을 죽이는 자들이 다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 얻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사도바울이 이 기도 속에 들어온 자가 되었지요. 물론 이 기도는 스데반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신대로 이루어졌지요. 그러나 주님의 백성 아닌 자들은 결코 죄용서함을 받지 못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누가 읽습니까? 이방인들이 읽지요.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곧 자신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란다고 해 버립니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합니다.

이 심정이 누구의 심정입니까? 주님의 심정이지요.

그렇다면 하나 질문해 봅시다.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똑 같은 생각입니다. 이것은 말하나 마나지요.

지금까지 사도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여기에서 왜 자기 혈통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고 들어 옵니까? 그 이유는 로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이방인들 때문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언제든지 자신의 구원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니 구원에 관심 있는 자들은 곧장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증인으로 살기에 고난 속으로 내 몰려 짐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다른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해야 하는데 이들은 자기 구원에만 관심을 가져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급커브를 돌려 보립니다. 그렇게 문제 삼았던 이스라엘의 구원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본문을 두고 또한 뒤에 나오는 분문을 두고 이스라엘, 즉 혈통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로마서에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6절 이후로 넘어가면 이런 생각이 엉터리임이 금방 드러납니다.

8절을 보세요.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이삭도 육신의 자녀이지요. 이스마엘도 육신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육신의 자녀에서 약속의 자녀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11-13절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지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에서와 야곱은 모두가 다 이삭의 자녀지요. 그렇다면 둘 다 약속의 자녀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야곱만 사랑했다고 합니다. 에서는 미워했고요.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에서를 그냥 버려 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미워하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아브라함의 씨 개념이 다 깨어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자신의 혈통의 구원을 언급하면서 왜 이 말씀을 들고 나옵니까?

여러분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까 아니면 서로 단절되어 있습니까?

약속을 따라 사랑받는 자 미움 받는 자가 정해져 있다면 사도바울의 말은 의미가 없지 않나요?

여러분 생각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장8절을 봅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마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고 하시면서 8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자신의 역할과 주님이 하신을 일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자로서 자신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사명입니다. 자신이 주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은 주님의 증인으로 살 뿐입니다. 이 땅의 인간들은 자신이 주가 되고 싶어 안달 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자신이 주의 자리에 앉아 주님 행세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도바울 보세요. 그는 증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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