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28 9장19-33

푸른 섬 2013. 5. 5. 13:41

 

로마서강해 28 9장19-33

토기장이

음성설교

로마서9장19-33

사도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가 자기 혈육, 즉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바울의 이 열심, 이 수고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져 오느냐고 했을 때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이 마음은 곧 누구의 마음입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의 마음이지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주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는 누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자인지 아닌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바울은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입니다.

그러니 누가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인지 알수가 없지요. 그러니 그는 오직 자신이 주님의 증인으로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혈통,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곧장 사도바울은 주님이 누구신가를 전하는데 온 힘을 쏟습니다. 자기 혈통, 이스라엘이 구원 얻는 것에 온 힘을 쏟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가로 시선을 확 돌려 버립니다.

주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 지신 주님의 능력밖에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즉 구원하시고,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즉 지옥 보내십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반론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래서 19절을 말씀하십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말이 좀 어렵지요.

자 이렇게 되면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바로왕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시죠.

믿지 않게 하는 분도 주님이시잖아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가 잘못했다고 책망하시느냐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에겐 잘못이 아무것도 없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가 잘못했다고 책망하시느냐 이런 뜻입니다.

우리와 똑 같은 생각하지요. 뿐만 아니라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주님께서 다 행하시는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겠습니까?

논리가 맞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확한 논리를 펴고 있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 논리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0절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서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이젠 더 심하게 말씀하고 계시지요.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습니까 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해 버립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분이 주님이시니 나를 책망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음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떻게 나를 이같이 만들었습니까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21절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자, 여기에서 한 가지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사도바울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주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스라엘이 구원 얻기를 바란다는 것과 주님께서 구원할 자는 알아서 하시는 것의 상충되는 점을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이렇게 지음 받았다는 것으로 논쟁자체를 끝내 버립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고 하시면서 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장 그 그릇을 박살내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고 기다립니다.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이 있습니다. 이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만든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두 종류의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잠 논쟁될 것이 많지요. 인간적으로 대화 불가능한 말씀을 하고 계시지요. 그러니 이런 말씀을 듣는 자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원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수도 없고. 그러니 이런 주님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곧장 어디로 넘어가고 있습니까?

긍휼의 그릇에 대해 언급해 버립니다. 긍휼의 그릇이 어떤 자들인지 봅시다.

24절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우리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로마에 있는 교인들과 사도바울일행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지요. 물론 일차적으로 말입니다. 이들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구원 얻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약속의 자녀가 예수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의 지체들이 약속의 자녀들 속에 들어가지요.

이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 봅시다.

25,26절입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들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시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중에서와 이방인 중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긍휼의 그릇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들 모두가 어떤 자들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까 아니라는 말입니까?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자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들이었지요. 이들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까?

유대 인중에서와 이방인 중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좀 이해가 안 되지요. 이방인들 중에 구원받을 자들을 말한다면 26,26절 말씀이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여기에 혈통적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집어 넣어버립니다. 유대인들은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또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자들도 이 말씀을 절대로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들에겐 유대인이 따로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유대인이 따로 있는것 같지만 주님께서 이들을 모두 이방인으로 만들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25-29절은 24절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24절로 이해하지 않고 유대인들 중에 구원받는 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 긍휼의 그릇에 대한 말씀이며 이 긍휼의 그릇은 혈통적 유대인들 중에 남은 자들이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와 이방인 중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25절 이하가 우리가 보기에는 꼭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 같지만 이미 로마서 3,4장에서 죄인에 대한 규정이나 구원을 말씀하실 때 유대인과 이방인을 따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9-11장으로 넘어 오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갑자기 십자가 지신 주님에서 이스라엘로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로마서의 관심이 인간 구원에 있습니까? 아니지요. 주님 되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끝까지 인간 구원을 놓지 않습니다.

인간의 손안에서 벗어났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손안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27,28절을 보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으니라”

이 말씀을 23,24절에 그대로 적용해 보세요.

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유대인 중에서고 이방인 중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29절을 봅시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인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긍휼의 그릇도 실상은 어떠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으리라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입니까?

롯과 두 딸이 구원받았다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께서 씨를 남겨 두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사야 1장1-9절을 보겠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퍼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의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의 땅을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이 말씀은 단지 이사야 시대의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의 상황을 동시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 중에서와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받은 상황이 어떤 상황에서 구원받았는가, 그 배경을 이사야 1장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물론 호세아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자신들이 행위가 깨끗해서입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입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이들은 소보다 못한 자들이지요. 성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남겨두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긍휼을 입었습니다.

왜 긍휼을 입었습니까?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 다르게 말하면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긍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30-33절을 봅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 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말씀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유대인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도바울도 의를 얻지 못해야 하지 않나요. 이 말씀은 거꾸로 보시면 됩니다.

믿음에서 난 의를 받은 자들이야 말로 참으로 이방인들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이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모두가 다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호세아 와 이사야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위를 의지하지 않는 자는 이 땅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에 부딪쳐 넘어집니다.

그런데 그 돌, 주님을 믿는 자가 있습니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아래 갇힌 자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만드셔서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찬양할 분은 십자가 지신 주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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