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신 천지일보 질문과 답변 3 이근호 목사

푸른 섬 2013. 8. 21. 22:04

⑯ 약속한 계시록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구원이 있는가, 없는가? 천주교와 개신교가 거의 계시록을 가감하고 있는데 거기에 구원이 있겠는가?

 

구원이란 이 세상에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구원이 얻는 곳이라는 판정과 더불어 무너져 내려 폐기처분되어야 될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신교나 천주교도 같이 무너져 내릴 세상적인 문화현상일 뿐이다.

 

인간의 문화란 실은 자본이 뒷받침되어 유지된다. 인간 세계에서의 통용되는 잉여 자본은 정신활동을 위해 최종적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힘의 방향성이 결국에는 신과 접촉하여 신의 나라를 가시화하기 위한 바벨탑 쌓는 그 본성을 발휘하는데 있다.

 

역사적으로 천주교나 개신교도 이런 시도를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 진리를 상품화하는 것이다. 예수를 산업화하는 것이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교회가 제공하므로서 인간의 노동에서 나오는 잉여물을 획득하고 축적하여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도 일종의 자본가로서 행세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세상은 돈을 원한다. 신자들의 헌금으로 축적된 소위 ‘신께 바치는 신성한 돈’이라도 세상은 어디까지 그냥 힘의 축적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들은 허리를 굽히고 굴복하는 것을 교회나 세상이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품위나 교회의 품위나 모두 돈이 결정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진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돈 힘에 고개 숙인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다. 돈 되는 하나님을 찾아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고 교회는 바로 그 자본을 미끼로 하여 운영한다. “우리 교회 나오시면 갖가지 혜택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영어학습과 노인네들의 여가 선용과 복지를 우리 교회가 책임지겠습니다.

 

가족간의 불화 해소를 위한 상담이나 취업을 위한 여건도 충분합니다. 공짜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대학생들에게는 ‘선교’라는 미명하에 실시되는 해외 언어연수를 보낼 것이고, 혼기가 찬 젊은이들의 결혼이나 새로 가게를 오픈했다면 단골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여건도 우리교회에서 충분히 마련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영업 사원들의 판매 실적도 우리 교회 각 기관에 참여하여 활동하시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자녀들의 교육과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우리 교회는 예배당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습니다. 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헌금이 그만큼 귀하게 쓰여진다는 이 의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경영방침만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교회다.

 

 

하지만 구원이란 오직 십자가 사건 안에서 반복적으로 주어질 뿐입니다. “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성경은 구원을 제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으로서 필연적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오직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이점에 대해서 오해해서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이처럼 인간의 생존욕구를 ‘축복’ 혹은 ‘구원의 능력’이라는 기대와 맞아떨어져서 ‘예수 산업’을 통해서 구원 자체가 상품화되면 그 영업으로 인하여 여유자금이 모이게 될 것이고 그것은 권력화의 모습을 띠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그 짐승의 모습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전쟁은 교리 전쟁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라는 유사 복음과의 전쟁이고 곧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다.

 

⑰ 신약의 약속대로 추수된 적이 있으며, 인 맞은 적이 있으며, 12지파에 속한 적이 있으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한 적이 있는가? 이것이 없어도 구원이 있는가?

 

구원이란 우발적 사건일 뿐이다. 구원을 쥔다든지 구원을 갖는다든지 하는 것은 인간이 성사시킬 수 없는 일이다. 신약에 나오는 모든 일들은 이미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진 일로 취급된다.

 

이것이 바로 언약적 사건이라고 합니다. 언약적 사건은 시간의 진척과정으로 완성과 비완성을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세대 안에 일괄적으로 갇혀 있는 신세인 인간들은 ‘부분은 전체를 모른다’는 원리에 따라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추수와 심판을 이해할 뿐이다.

 

 따라서 오직 유일무이한 사건이 모든 말씀과 약속의 완성으로만 거론되고 그것만 증거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고 사도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다. 이 십자가 사건도 오늘도 쉬지 않고 인간적 시간 의식에 포착되지를 않고 반복적으로 순수 사건으로서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침투될 뿐이다.

 

로마서 8:30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문장에 나와 있는 시제는 모두 완료형이다. 즉 이미 ‘의롭기 되기’ 와 ‘영화롭게 되기’가 이미 하늘나라에서는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언약 완성) 완료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남은 것이 이 완성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 안에서 반복적으로 그 결과가 통보될 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미 ‘혼인잔치 참여되기’가 완성되었기에 성도는 ‘혼인잔치’에 참여될 것이다. 마치 구원이 되었기에 구원에 참여할 날이 남아있고 (고후 1:10)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언약을 완성했기에 재림이 하실 일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원은 바로 이런 절차 자체를 두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구원을 소지할 입장은 못된다. 그저 구원 작업에 참여될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고정시켜놓는 방식으로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자신들의 죄악된 본성대로 움직임을 갖도록 하시면서 그 와중에서 뿜어져 나오는 죄를 겨냥하면서 복음과 연계시키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 이렇게 되면 성도만이 자신이 그 무슨 일을 하더라도 구원은 자신의 공로나 성과가 가미될 수 없음을 늘 한없이 고백하게 된다.

 

⑱ 두루마기를 빨아 입고 생명나무가 있는 성에 들어가려고 한다. 이 거룩한 성은 어디에 있으며, 거룩한 성에 있는 생명책에 녹명된 적이 있는가?

 

두루마기를 빨아 입고 생명나무에 있는 성에 들어가려는 자는 들어갈 자도 아닐 뿐더러도 그 성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자이다. 당연히 생명책에 명단이 없는 사람이다. 정말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이미 자신이 예수님 십자가 위력 안에 놓인 것을 믿는 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루하루 생활을 자꾸만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는 하루요 세월이라고 생각하니 지금 주님께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시키고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증거케 하는 하루하루를 보여주기 위해 생존하는 세월임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살아있다는 나를 산 채로 천국으로 밀어 넣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소용없는 짓이다. 천국은 ‘나의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입장된다. 나의 이름이란 나의 역사를 의미한다. 내 뜻을 이루겠다는 것은 범죄다.

 

인간은 원래부터 피조물이다. 창조주를 위하여 존재하지 결코 자신의 행복이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서는 아니되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영위하고자 하는데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저주다. 인간은 ‘나답다’는 것을 확정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속임수를 써본다.

 

나 아닌 나를 계속 외부에서 찾고자 하고 그것을 모방하여 획득하려고 추구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기만에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정말 나다운 모델도 모르는 가운데 끊임없이 새 모델을 구하여 바꿔치기 하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매일 같이 ‘나는 이대로의 나를 진정 인정 못 하겠다’는 속임수 같은 것이다.

 

 이 속임수가 외부에 들키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속이도록 부추기고 그래놓고는 그 오류의 탓을 자기를 향한 그들의 속임수에 있다고 핑계될 참이다. “여기 절대적으로 살아가는 나를 봐 달라”는 외치고 싶어서 즉 자신이 자신을 향하여 벌리는 속임수에 타인들을 끌어당겨놓고서는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면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살도록 만들었으니 당신네들이 나쁘다”고 항의할 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즉 말씀을 매개로 하여 내게로(예수님에게로) 건너올 수 있다 면 건너와 보라는 말씀이다. 제자리에서 평생 자신을 위장하는 것으로 세월 보내지 말고 예수님을 던져주신 말씀을 건너서 예수님의 나라 이쪽으로 합류될 수 있거든 해보라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자기 쪽에서 자비를 베풀어 ‘원수’를 아예 안 만드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아예 원수가 없다고 여겨서 말씀 자체를 무효화 시켜서 해결하려고 한다. 예수님의 방법은 이렇다. ‘성도=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롬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고 그 원수 된 자 앞에서 십자가 피를 뒤집어쓰시고 나타나신다. “네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노라!” (행 9:5 “나는 네가 핍박하던 예수니라”)

 

악마가 보고 싶다면 자기 모습을 보면 되고, 지옥이 보고 싶다면 이 세상을 보면 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한복판에서 피투성이채로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셨다. 그곳이 바로 거룩한 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2-14)

 

생명이란 곧 이 땅에서 복음으로 인한 죽음을 의미한다. 스데반집사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하셨다. 이 죽음은 단순히 목숨 빼앗김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대장질’하는 것을 포기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즉 “누가 더 높은가”를 포기하는 것이 그 방향성으로 보여주는 고난의 모습인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사셨던 방향성이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9)

 

이 고난에 참여된 자가 곧 생명책이 기록된 자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⑲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신 곳에 생명책이 있는가, 없는가? 자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았는가? 없으면 천국(거룩한 성)에 못 들어간다.

 

생명책이 있다는 사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보고 안 사실이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출 32:32) 즉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이미 누가 구원되고 누구 필히 구원되지 못할 자인지를 정해져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지우고 아니 지우고 라는 언급이 나오는 경우는 이 지상에 언약의 본질과 취지를 바깥으로 알려주려는 방편으로 활용되어진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9:11에 보면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에베소서 1:4-5의 말씀을 역사 팽창을 통해 실제화 시킨 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도 바울의 존재가 또한 적절한 예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생명책의 명단 확인은 인간이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늘 확인시켜주신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고백에 동참시키므로 서 말이다.(마 26:39)

일을 저질러놓고서 해피 엔딩은 고대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신을 속이는 짓이다.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하고서도 자기 인생만큼은 행복을 원하다니! 이 속임과 속임으로 버텨 나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하지만 이 인생들은 나락으로 빠지는 가속이 붙어있다. “멸망으로 통하는 길에는 찾아가는 이가 많다”(마 7:13) 예수님께서 이미 단언을 내리셨다. 이상하다. 멸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쪽이 진리라고 여긴다.

 

그것은 진리에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해피엔딩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문제 있다는 것은 감추고 문제있는 자를 그대로 천국에까지 골인시키려고 시도한다. 즉 천국이 어떤 곳이며 누구만을 섬겨야 하는 세계인지도 모르면서 평소에 자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사는 자기 자신을 억지를 부리면서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자기 싸움을 마지막 기도를 통해서 하셨다. 그만큼 죄의 가장 무거운 무게는 역시 모든 것을 자기 생존과 자기 이익으로 회수시키는 죄의 마지막 발악을 예수님도 몸소 체험하신 것이다. 이런 죄를 체휼하신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죄에 매여사는 자기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그들을 친히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꿀을 놓으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가? 마태복음 7:15의 말씀은 더욱 충격적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즉 사람들이 멸망의 나라에 이르기 전에 미리 마중 나온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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