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64 약속과 할례

푸른 섬 2014. 3. 23. 15:59

약속과 할례

로마서158

아담과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뱀은 여자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이 말씀에 따라 움직여지기 시작합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물론 여자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이 단독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뱀의 후손과 함께 등장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전쟁터를 목격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지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약속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해석을 할까요?

 

뱀 때문에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 여자의 후손이 오면 뱀의 머리를 쳐서 우리를 다시 에덴동산으로, 즉 천국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를 본문을 보게 되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케 하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견고케 라는 표현은 확정하다는 표현입니다. 약속을 확실히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약속을 견고케 했다고 합니까?

할례수종자, 즉 할례의 종이 되셔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셨답니다.

그렇다면 할례의 수종자, 할례의 종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할례라는 것은 창세기17장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열국의 아비가 되는 방법, 즉 비법을 알려 주셨지요.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면서 언약을 세우셨는데 그 언약이 할례언약입니다.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란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즉 열국의 아비로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이름을 바꾸시면서 맺으신 언약이 할례언약입니다.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는 방식이 할례언약의 방식을 취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할례라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내는 것을 두고 할례라고 합니다. 즉 이 후로 태어나는 자식들은 육적으로 태어난 자녀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들이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4장을 보게 되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기 위해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 모세가 자신은 말에 능하지 못하여 갈수 없다고 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정도 되면 우리 같으면 순종하겠지요. 그런데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라고 합니다. 자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레위사람 형 아론을 함께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게 너의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겠다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팡이로 이적을 행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서 내 아들을 놓아 나를 섬기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놓기를 거절할 것이고 그래서 애굽의 장자들을 죽일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바로에게서 구원하라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 죽이려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날카로운 돌을 찾아서 아들에게 할례를 하여 그 할례 한 것을 모세에게 던지며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 남편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아 주셨습니다.

 

논리가 이상하지요. 가기 싫다는 모세를 가라고 하셨고, 말 못한다고 하니 내가 너에게 말을 주겠다고 하셨고 아론까지 붙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에 가서 할 일과 일어날 일까지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모세를 죽이라고 합니까?

 

그 이유를 할례, 즉 피 남편이라는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17장에 나오는 할례언약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분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사라가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명의 아기도 낳지 못하고 그냥 자녀 없는 자로 생을 끝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년 이맘때쯤에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다 비웃었지요. 불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일 년 후 이들은 진짜 웃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불렀지요.

 

여기에서 태어난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입니다. 로마서98절에 나옵니다. 물론 이 약속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할례언약으로 태어난 자녀입니다. 자신의 노선에서 태어난 하갈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오히려 약속의 자녀를 핍박합니다.

 

지금 모세가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러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러 가는 자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기 아들은 할례언약속에 속한 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힘으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모세의 사고방식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서 지금 여호와의 명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구출하는 방식도 이런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못가겠다고 한 이유도 자신이 구출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구출도 동일한 입장에서 이해한 것이지요. 이것은 단지 모세의 문제점만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출 받았을 때 그들의 구출 출발점이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을

늘 새롭게 만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보내는 중 숙소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즉 이스라엘이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먼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할례 언약, 육과 단절된, 피로 구원받은 자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이 분명해 지겠지요.

 

할례언약과 상관없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는 다르게 표현합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하지요(2:28-29).

 

즉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로마서를 보게 되면 참 이스라엘은 주님의 화목제물로 죄용서 함을 받은 자가 참 이스라엘입니다. 이런 자들을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모세당시 육신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할례가 무효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효했다면 모세를 죽이라고 하실 이유가 없지요.

 

모세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예수님이 할례의 수종자, 할례의 종이 되셨다고 하셨지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할례의 수종자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기 위해 예수님 자신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말입니다.

로마서12,3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혈통을 완전히 단절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15절을 보게 되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라합이 누군지 아시지요.

. 기생 라합입니다. 아주 유명합니다. 여리고성 사람, 이방여인, 기생 라합니다.

여호수아21절에 보면 기생 라합이 나옵니다. 기생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듣고 여리고성 사람들과 같이 마음이 녹았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이스라엘 속에 편입해 버립니다. 그래서 정탐들을 숨겨 주고 자신이 이스라엘 속에 귀속되어 버립니다.

 

여러분 당시 여리고 전쟁할 때 아간 외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유다의 후손을 이어갈 때 얼마든지 하나님에 말씀에 순종 잘하여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사람 속에서 다윗의 조상을 만들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생각해 본적 없습니까?

 

왜 하필, 그것도 과거가 기생인 여자, 그것도 여호와하나님께서 진멸하라는 진멸의 대상인 가나안 여인입니까? 만일 여러분 집안에 이런 사람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겠습니까?

 

그저께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사람이 천국 간다면 나 같이 살아온 사람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할례의 수종자란 기생라합과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어도 구원받을 조건이 되지 않는 자를 구원하는 일이 할례의 수종자가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했습니까?

 

자신들은 분명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겁니다. 이것뿐일까요? 아닙니다. 예레미아926절에 보면 마음의 할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예레미아 말씀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니 말씀대로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자신들이 생각할 때 자신들은 마음조차 할례를 받은 자로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의 모습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났잖아요. 그런데 자신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결코 예레미아 선지자의 책망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지내시니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까요(11:19)?

자신들과 놀지 않는 예수님이 얼마나 미울까요?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21:31).

예수님은 꼭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비교하시면서.

 

우리들이 살면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 중 하나가 남과 비교하는 것이잖아요.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남과 비교하여 말하면 그것보다 듣기 싫은 소리 없잖아요. 시집과 친정을 비교하거나, 다른 친구는 공부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고 하면 반응이 어떻습니까?

 

이번에 우리가 아주 작은 일을 겪었잖아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신을 아주 나쁜 그런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협박은 협박대로 다 해놓고 하는 말이 나는 이렇게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 보이고 싶지요.

이게 비단 그런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도 마찬가지고, 여기 않아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난 하나님을 믿으니, 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니,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할례의 수종자라고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자신의 행위로, 자신이 살아온 것을 근거로 구원받을 인간 아무도 없게 하시고 오직 할례언약대로만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목사들을 보게 되면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은 당연히 천국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을 위해 지금 하는 일이 모두 다 주님의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할례의 수종자 되시는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는 구원의 능력을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의 행함으로 바꿔치기 하는 자들은 할례언약 밖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는 자들입니다. 오늘도 할례언약의 종으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다 지키신 주님의 의해 주님의 백성은 십자가의 피만을 바라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