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61 교훈. 성경의 위로.

푸른 섬 2014. 3. 2. 19:49

교훈, 성경의 위로

 

로마서 15장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14절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성경을 말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시편69편을 말씀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모든 성경을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3장16,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15장14절 말씀과 디모데후서 3장16절 말씀을 보면 성경은 누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겁니까?

우리, 즉 성도들에게 교훈하기 위한 기록되니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대충, 아무나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은 성령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리고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분명 성도이지요.

 

사람들은 성경을 이렇게 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아니 나를 위하여 기록되었다라고 보고 싶어 하고 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대할 때 항상 자신과 관련지어 성경을 봅니다. 설교를 해도, 설교를 들어도.

 

나와 관련지어 성경을 읽고 설교 하는 것은 성경말씀이 끊임없이 나를 긍정해주고, 나를 지지해 주고 , 나의 나됨을 견고하게 해주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성경 말씀은 나에게 힘이 되고 나의 길이 되고 나의 빛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누구의 생각이었는고 하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즉 구약성경,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자신이 축복받고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방법.

 

이 방법 외에는 축복받고 영생 얻는 길이 없어요.

구약성경을 읽어 보시면 이게 정답이에요.

 

다른 정답이 없어요.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구원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게 되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도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멸망당했습니다. 저들이 선지자들의 외침을 듣지 않았지요.

회개하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고.

 

저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니 구약성경을 읽는 자들은 죄의 출발을 자신에게로부터 잡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자신이 회개하고,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엔 이 생각이 옳습니까 틀렸습니까?

당연히 옳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지런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고 말씀대로 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영생을 얻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5장39절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사람들의 교훈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자신들을 위한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이 누구를 위한 말씀이라 생각합니까?

성경 읽지 않고 보지 않는 사람에겐 이런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지요.

 

그러면 왜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고 보지 않을까요?

 

이들은 성경이 나를 교훈하는 말씀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도움 되는 교훈을 성경이 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지요.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나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사람은 성경말씀이 자기를 교훈이라 생각해서 열심히 읽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그와 정방대로 자기를 교훈하는 말씀이라 생각해서 읽지 않지요.

 

또 한 부류가 있지요. 성경에 나오는 자들입니다. 성경말씀을 왜 듣지 않으려고 합니까?

듣기 싫습니다. 말씀 들으면 분노가 일어나고 짜증나기 때문에 성경을 덮어버립니다.

성경말씀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말씀의 교훈을 받기 싫다는 말이지요.

 

세 부류 모두 성경말씀을 대할 때 자기와 관련지어 성경말씀을 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경말씀에서 인간을 쏙 빼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하신다면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 읽을 필요 없어지잖아요.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읽고 묵상하면 되지만 예수님을 위한 성경이라면 우리가 읽을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도 아닌데 성경 읽을 이유가 없잖아요.

 

만일 성경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성경 읽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성경한절 읽으면 돈이 생긴다. 성경한절 외우면 영어를 더 잘할 수 있다. 성경한절 읽으면 공부를 더 잘한다.

 

그러면 아마 성경 열심히 읽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외우게 해서 공부 잘하게 하려는 사람도 있어요. 유대인들이 성경을 외워서 똑똑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성경을 외워 똑똑한 아이로, 유대인처럼 똑똑한 아이로 키워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전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에는 앞서 언급한 그런 도움을 우리에게 주지 않아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함께한 구약 이스라엘이 어떤 일을 당했습니까?

 

민수기21장4-9절을 봅시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 지라 배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죄를 범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리라”

 

출애굽을 누가 시켰습니까? 여호와께서 출애굽시켰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진노를 내리시지 않았다면 홍해를 가르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수 없었겠지요.

 

그러면 우린 어떤 생각합니까? 구원해 주셨으면 그 다음은 책임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가는 길이 평탄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는 길로 인해 마음이 상했습니다.

마음이 상할 수 있잖아요. 우리가 살면서 마음이 상할 때 없습니까? 그리고 원망했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가는 길이 험하니 짜증나고 화나고 원망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시작해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으면 그 다음은 홍해를 가르듯이 모든 길에 평탄함을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힘든 길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원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여호와께서 죽였습니다. 그것도 불뱀들을 보내어 죽였습니다.

 

아마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원망에 문제점을 삼을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호와께서 출애굽 시키시고 인도하신다면 힘든 길을 만나게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뿐만 아니라 원망한다고 불뱀까지 보내어 죽여 버립니다.

 

이게 바로 말씀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때, 즉 말씀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결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이 풀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도 보았고 여러 가지 기적들을 경험하지요. 그러나 이런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의 군대를 죽이듯이 이스라엘도 죽이십니다.

 

그들이 출애굽하지 않고 애굽에 있을 때에는 원망이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출애굽한 상황에서는 이렇게 죽이십니다.

 

따라서 출애굽이라는 것이 자신들을 위한 출애굽이 아님을 이들이 알아야 하겠지요.

만일 출애굽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는 일이라면 끝까지 구원으로 끌고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광야에서 죽이셨습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손으로.

 

오늘 본문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하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 하는고 하면 우리는 저들처럼 불순종하지 말자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도 나오지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시편 96:7절을 인용해서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이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듣는고 하면 저들처럼 나는 불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교훈으로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훈이라고 하면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마서15장4절 후반부를 봅시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여기에 보면 인내라는 말씀이 나오고, 성경의 위로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먼저 무엇을 인내한다는 말입니까? 교훈을 받게 되면 참아서 말씀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평생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살수 없어요.

 

주님의 피로 구원하셨으면 그 다음은 책임질거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 하지 않는 인간 없어요.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다 주님의 은혜로 여기는 인간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내는 우리의 인내가 아닙니다. 주님의 인내입니다.

뒷부분에 나오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한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성경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긍휼을 보여 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분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그런 죄인에게 긍휼을 베풀었다는 사실. 이것이 성경의 위로지요.

 

어떤 인간도 자기가 인내해서 구원받을 인간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교훈을 삼아 노력하고 노력해도 구약이스라엘의 행위를 못 벗어납니다.

 

로마서 5장3-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소망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어주신 것이 소망입니다. 더 나아가 환난조차도 내가 만들어 낼수 없는 것이고 그러면 인내도 그러하고, 연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조장하신 환경 속에서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죄인이었지요. 화목제물 되신 주님의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환난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내가 나오지요.

형제 관계 속에서 왜 인내가 나올까요?

참아야 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이 인내가 아닙니다.

 

지난주도 말씀드렸듯이 십자가만 자꾸 이야기 하니 형제라는 자가 핍박을 가하기 때문에 인내가 만들어집니다.

성경의 내용이 우리자신들에게 뭔가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니 상대가 핍박을 가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에게 환경이 주어졌다고 하니 분노를 내지요.

 

그래서 성령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말씀대로지요.

 

주님께서 긍휼 베풀자 에게 긍휼을, 강퍅케 할 자는 강퍅케 하시는 것을 대면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위로가 됩니다.

 

그러니 성도는 주님과 함께 거하려는 소망이 더욱더 커지겠지요.

 

주님이 구원하셔서 한 몸으로 불렀다면 사이좋은 모임, 공동체, 함께 꿈꾸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셔야 되는데 오히려 이속에서 핍박을 만드시고 인내를 만드시고 소망을 만들어 내실 때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주님의 피로 구원한 교회라면 핍박하는 일이 그 안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이런 자들이 핍박을 하고 미워하지요.

 

구원이란 주님이 누구신지를 증거하기 위해 베푸신 주님의 은혜인데 저들은 자신들을 위한 구원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