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59 강한 자 약한 자

푸른 섬 2014. 2. 16. 17:35

믿음의 강자와 약자

로마서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강한 자라고 하셨는데, 믿음이 강한 자들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믿음이 약한 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의심하지 않고 먹는 자들이 믿음이 강한 사람들일까요?

그러면 의심하고 먹는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입니까?

 

아니면 형제를 거리끼게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까?

여기에서는 형제를 거리끼게 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입니까?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겠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항상 내가 어떻게 행동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늘상 내 행동을 근거로 예수님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자기 행동이 자기 생각에 나쁘지 않다고 여기면 믿음이 좋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자기 행동이 자기 생각에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자기를 자책하면서 나름대로 회개하고 눈물 흘리고, 다시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심도 얼마 가지를 못하지요.

 

첫째아담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귀를 막아 놓으셨으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모 알아듣는다고 해야 할 텐데 이 땅의 인간들은 포기할 줄 모릅니다.

기어코 말씀을 알아듣겠다고 덤벼들고, 결국 자신이 예수님 말씀을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지요.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지요.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을 연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충분히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궁금한 것은 묻고, 기적도 행하고 귀신도 쫓아 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보면 어떻게 평가합니까?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평가를 하지요.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비판합니다.

교만했다고 비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다고 비판합니다.

 

자기를 너무 사랑했다고 비판하지요.

 

왜 예수님을 못 알아 봤냐라고 비판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 이런 소리 하지 않는 사람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자신이 얼마나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를 자랑하기 바빠요.

그래서 교회 일에 충성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라는 집단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다른 삶이요, 제자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치면 믿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나옵니다.

사람에게 행함이 없다면 타인을 비판하겠습니까?

행함이 없다는 말은 타인을 비판할 기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어떻다는 말을 할 수가 없지요.

 

믿음이 강한 자, 믿음이 약한 자가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우리의 사고는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순간 믿음이 강한 자가 어떤 사람이, 믿음이 약한 자는 어떤 사람이지? 그렇다면 나는 믿음이 강한 자인가 약한 자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즉 죄인들은 저주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628절에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이들이 그냥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은 체험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6:26,27

 

예수님을 찾아 나선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왜 나를 찾느냐? 떡 먹고 배부르니 나를 찾지 않느냐? 즉 나에게 뭔가 얻을게 있으니 찾지 않느냐?

 

오늘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 해 보세요. 어떤 반응 보일까요?

아마 좋아라 할 겁니다. 맞아요. 저는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 예수님이 나에게 효용이 있으니 예수님을 찾아 왔어요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들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의 그런 사고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구원과 예수님을 찾는 자들의 구원이 다르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자들의 구원과 예수님의 구원이 달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들이 지금 나를 찾는 것은 썩을 양식을 찾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믿어봐야 지옥 갑니.

 

예수님은 사람취급을 해 주지 않습니다. 사람 취급했다면 좀 다정하게, 상대가 기분나쁘지 않게 대해 주셔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무리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라도 그들 모두를 사람취급하지 않습니다.

 

저를 아는 목사님이 제가 이렇게 말하면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표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 목사님 말은 의인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왜 저에게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듣기에 기분이 좋지 않. 나쁘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꼴에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해요. 꼭 이스라엘 백성들 같아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우린 죄인들과 다르다. 우린 세리와 창기와 다르다. 그러니 우릴 저들과 함께 집어넣지 마라. 우린 의인이다.

 

이런 입장에 있는 자들이 많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씀이겠습니까?

 

너희들이 하는 모든 짓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지옥간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단은 상대를 부정해 버립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 자신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장을 잘 보세요. 이미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인데 무슨 수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자신들은 수 있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영생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하겠습니다. 알려만 주십시오. 목숨도 내어 놓겠습니다라는 입장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믿겠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만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당신을 믿을만한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친절하게 만나를 예로 들어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신다. 이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라고 합니다.

 

표현이 재미있지요. 여기에 주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생명의 떡을 주실 분이라고 말입니다.

 

뭔가 대화가 되는 것 같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리면서 예수님을 비웃지요.

 

요셉의 아들 예수인 것을 다 아는데, 너 부모를 우리가 다 아는데. 헛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제는 세상이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이 떡이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정말 점잖게 표현하지요. 먹은게 있고 본게 있으니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님의 제자중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홀로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로 행세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9장을 보면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죄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났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이며 살지요. 우리도 질문합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왕자로, 왕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었습니까? 거지가 되었습니까? 부자입니까? 예쁩니까? 못났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이렇게 하셨습니다.

 

939절에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즉 예수님이 심판주 되심을 증언하기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며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헤롯은, 본디오 빌라도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심판주 이심을 전하기 위해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믿고 행하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일을 보여 주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를 함께 섞어 두심으로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만 증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