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58 믿음과 자기가 옳다하는 바

푸른 섬 2014. 2. 9. 16:21

믿음과 자기가 옳다하는 바

로마서14:19-23

로마서1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지요.

하박국 24절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14절에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악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고 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악인에 대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이 종말이 속히 임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종말을 말씀하시면서 4절에서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로마서로 그대로 옮겨보면 로마서는 하박국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의인이 있다고 합니까 없다고 합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로마서3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을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성령을 받은 사도 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세상을 이러게 보십니다.

 

세상은 모두가 악한 자들이며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하박국을 보게 되면 그래도 세상에는 의인이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니 세상엔 의인이 하나도 없음이 드러납니다.

즉 심판주 되시는 분이 이 땅에 오니 이 땅에는 구원받을 의인이 하나도 없음이 드러납니다.

 

로마서에서는 지금 이것을 온천지에 도배를 해 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의인이 없다는 사실을 도배하지 않고 말씀을 보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하박국에 나오는 의인을 곧장 자기에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자신은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우깁니다.

그러다 보니 로마서3장에서 하시는 말씀은 자신을 피해가는 말씀이 됩니다.

 

의인은 없는 것이 아니고 의인인 나 여기 있다고 합니다.

자신은 깨닫는 자요, 하나님을 찾는 자요, 자신은 치우치지 않고 함께 유익하게 되며, 선을 행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결코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목구멍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혀로는 철저하게 선한길로 인도하는 자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말씀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입에는 축복이 있고, 자신의 발은 남을 살리는데 빠르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나오는 설교는 한결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설교입니다.

 

즉 방금 말씀드린 대로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오늘날 한국교회에 왜 문제인가?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렇답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사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자라고 설교합니다.

 

성경구절구절을 말하면서 말씀대로 살자라고 목소리 높이지요.

 

그러면 듣는 사람들 어떨까요?

아멘하지 않을 수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맞는 말을 하잖아요.

말씀대로 하잖아요.

 

그런데 만일 이렇게 설교하는 자대로 설교를 하게 된다면 로마서 3장 말씀이 문제가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바꾸어야 합니다.

 

의임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의인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앞서 말한대로 설교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마서11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는 말씀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과거고, 이제는 긍휼받은 자들은 순종하는 가운데 두셨다고 말입니다.

아니면 그들 언어대로 우린 이제 자유의지가 있어요. 그러니 순종하는 자로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악한 자들은 자신이 긍휼을 항상 받아야 되는 자라고 생각하지를 않아요.

 

더 나아가 긍휼을 주시면 감사하고 주시지 않아도 당연히 조치라 생각해야 하는데 악한 자들은 자신은 당연히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수기16장을 보면 모세를 대적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1,2절을 봅시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은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이들의 말을 들어 보세요. 얼마나 합리적인지. 말씀대로인지.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이들의 말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다는 말과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다는 말이 맞지요.

그런데 이들이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장 직분입니다.

 

성막에서 잡일 하기는 싫고 주목받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겁니다.

 

이들의 속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세를 향해 네가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즉 고라당은 자신들이 왕의 자리에 앉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제사장들만 들 수 있는 향로를 고라당에게도 들게 합니다.

 

결국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습니다.

 

고라와 그와 함께 한 무리들은 자신들의 역할만 수행하면 되는데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누가복음531-32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은 금식도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도 하고 선교도 하고, 헌금도 하고, 구제도 열심히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죄인이 아닙니다.

누구와 비교해서. 세리나 창기와 비교할 때.

 

자신들은 의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 즉 자신들이 보기에 틀림없는 죄인인 세리뿐만 아니라 세리의 친구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헌금 잘하고, 말씀대로 살고, 금식하고, 전도 잘하는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고 꿀떡같이 믿고 있어요. 마치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입니다.

 

자신들처럼 말씀대로 사는 사람과 함께 하셔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지 어떻게 죄인과 함께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증언이 있었으니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있게 지켜보았겠습니까?

 

그런데 의인인 자신들은 죄인이라고 하고 자신들이 보기에 죄인들과 친구되어 함께 하니 얼마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겠습니까?

 

로마서1419-23절 말씀을 보면서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그래. 우리들은 화평의 일과 덕을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자.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고 했으니 거리낌으로 먹지 말자.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하지 말자. 믿음을 지키자. 의심하지 말고 먹자. 믿음을 따라 살자.

 

제가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의 해석이라 말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해석을 하지 않을 사람 있을까요?

 

있지요.

죄인인 자들. 세리와 창기들은 이 말씀을 결코 바리새인처럼 해석을 할 수가 없어요.

 

22절을 봅시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인간이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요?

또한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할 수 있을까요?

 

왜 이런 질문을 드리는고 하면 사망이 왕노릇한다고 했지요. 로마서514절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는 내가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까?

죽은 자가 무슨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오히려 우린 로마서1419-23절을 보면서 화목재물되신 예수님밖에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게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는 말씀에 합당한 말씀이며,

 

이것이야 말로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런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의인은 주님이 부르지 않습니다.

 

역할이 죄인의 역할로 부름을 받았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왕이 되려고 하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