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56 음식과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

푸른 섬 2014. 1. 5. 18:37

음식과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

로마서1413-16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보면 사람 좋아라고 하는 말이 하나도 없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이렇게 반박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고 요한복음316절에서 말씀하시잖아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말씀이 아닙니까라고 합니다.

만일 이 말씀이 사람에게 좋다면 믿지 않는 자는 지옥 가는데 , 그런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려질까요? 뿐만 아니라 이 말씀에 해당되는 가롯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식으로 결론 났습니까?

물론 성경에 이들의 모든 삶이 다 드러나지 않지만 요한복음2118,19절을 보면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한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런 삶을 좋아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마 이런 사람을 있을 겁니다. 자신이 자원해서 나는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사는 삶을 즐길 겁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해서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래서 지금도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형편이 어려운 곳에 가서 함께 굶기도 하고 병도 들기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 돈 벌이 하는 자들도 많이 있겠지만 , 그런 자들과 다르게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지요.

그런데 만일 이들이 이런 일을 원해서 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말씀과 달라요.

베드로는 베드로 자신이 원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고생, 자신들이 원하는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 나의 사명이요,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모습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감동을 먹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달라요. 자신은 이렇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자신은 원하지 않는데 누군가 자신을 그런 곳으로 몰아갑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베드로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는 것이 달라요. 그런데 베드로가 져요. 이렇게 되면 베드로는 뭐라고 고백하겠습니까?

그 고백을 사도바울을 통해 들을 수 있지요. 고린도전서15:10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바울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누가 보더라도 사도바울이 수고 했지요. 그런데 은혜를 받은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평가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즉 자신이 한 일이 아니고 주님이 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주님이 은혜로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수고해도 사도바울이 수고가 아니에요.

말장난 같지요. 육에 속한 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이들의 판단 기준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즉 땅이 기준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세계, 영적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겠지요. 기꺼해야 사도바울 흉내를 냅니다. 자신이 원해서 어려운 곳, 힘든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 놓고 하는 말이 이것은 주의 은혜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면 복음의 내용이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이게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는 것의 싸움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는 것이 일치 된 자들은 십자가만 자랑 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이고 이젠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신이 변화되어 이 일을 감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복음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4-6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스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죄인이 그 피로 용서함을 받아 옳게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자신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입니다.

 

자신들의 사명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꼭 집어넣어야 합니까?

그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옳게 여기심을 받아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될텐데. 꼭 여기게 부정적인 말을 집어 넣어 사람을 기쁘게 하려함이 아니요라는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아담 안에 사는 자들은 부정적인 말에 발작을 일으킵니다. 물론 긍정을 하기 위한 부정은 그런대로 인정을 해 주지만 아예 부정을 해 버리는 말에 대해서는 가만 있지를 못해요.

주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거 처음 듣습니까?

8절을 보면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이렇게 하는 이유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9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먹고 살기가 정말 빠듯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밤낮으로 일을 했겠지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이들을 칭찬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칭찬하겠지요. 칭찬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기쁘다는 말입니다.

이야. 정말 저 사람들 인간 되었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돈을 밤낮으로 일하면서 버니.

오늘날도 마찬가지지요. 밤낮 일하면서 돈을 벌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두말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이유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낯선 이야기지요. 우리가 보기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같은데. 그래야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상당히 다르지요.

이렇게 말하면 , 어찌되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되어 버려요.

무슨 말인고 하면 이렇게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받은 자들이 어떤 상황으로 내 몰립니까? 많은 환난 속으로 내 몰립니다. 고난 속으로 내 몰립니다.

그러니 그들이 사는 삶이 훌륭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취미 생활하는 자들에게는 해당되겠지만 고난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복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어서 예수님을 믿게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고난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고난과 호감은 동일한 성질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단어가 나오는데 아첨이라는 단어와 탐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아첨은 왜 합니까?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아첨을 하지요. 저 쪽을 내 편 만들려고 아첨을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무언가를 얻어 내기 위해서.

그리고 탐심이라는 말은 헬라어에 빼앗다. 강탈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아첨해서,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리, 사람들에게 본을 잘 보여서 이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내기 다르게 표현하면 아첨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고 그 다음 그들로부터 돈을 뺏는 목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은 이런 방식을 취하고 이런 목적을 갖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복음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아첨을 하고 최종적으로는 그들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자신의 소유로 만듭니다. 자기 종으로 삼지요.

에스겔2415-24절을 보면 희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에스겔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여호와께서 에스겔이 기뻐하는 자인 그 아내를 죽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에스겔에게 왜 이런 슬픔을 줍니까?

그러면 죽은 아내는 뭐가 됩니까? 그러면 그 가족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한다면, 적어도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면 에스겔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된다는 게 우리 입장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는 것에 의해 끌려갑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에스겔에게 이런 일을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일행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면서 복음을 전한 이유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즉 주님 되신 예수님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어요. 오히려 밤낮으로 일하면 몸은 더 피곤하고, 짜증나고 할 것 아닙니까?

돈 버는 일이 그렇게 쉽나요? 쉽지 않잖아요.

아내가 죽었어요. 주님이 어떤 분이심을 전하기 위해.

만일 아내가 경제도 책임지고, 자식교육도 책임지고, 다 책임진 아내였다면 어떠 하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는 뭘 먹고 살아요. 뒷일에 대해서는 일체 배려가 없어요.

아내가 죽은 것을 갖고 복음을 전해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으로 가면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주의 하라는 말은 조심하라는 말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결심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에 이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헬라어를 말할 필요가 없지만 하도 헬라어 하니 제가 헬라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자체가 율법이 되는데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라고 하셨으니 당연히 서로 비판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그런데 내가 있다는 자체가 이미 내 기준이 있다는 말이고, 내 몸은 나를 위해 사는 몸인데 이 몸이 다른 몸과 만나게 되면 당연히 부딪히게 되잖아요.

아예 서로 말하지 않고 설교만 듣고 가버리면 비판할 것도 없잖아요. 제일 좋은 것은 인터넷을 통해 설교만 보고, 들으면 비판할 것도 없고 부딪힐 것과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게 되잖아요.

아니, 또 이런 사람이 있지요. 왜 당신은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하면 이것 또한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었네요.

그러니 몸이 있는 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을 수가 없어요. 사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 일행이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전하는 것조차도 형제들에겐 어떤 모습일까요? 커다란 벽이 아닐까요?

로마서14장에서 아주 소소한 것을 갖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소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15절을 봅시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여기에서는 우상제물과 관련된 음식을 말하지만, 이것을 우리에게 끌고 오면 주일날 함께 식사하는 것 생각할수 있잖아요.

설거지 누가 하느냐? 어떤 반찬이냐? 국이 짜냐 맵냐? 밥을 게걸스럽게 먹느냐? 왜 흘리면서 먹느냐? 왜 국을 남기고, 반찬을 남기느냐? 왜 나만 밥해야 하느냐? 등등을 생각안하는 사람 있나요?

없어요. 그렇게 만든 사람이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만든 사람을 먹는 사람에게 그것을 유발시켰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누구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해도 너무하지요. 이런 억측이 어디 있습니까?

국 짜다고 했다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밥 좀 흘렸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그리스도만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서로 만나게 하시고 모이게 하시지요.

만나고 모이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이런 죄들이 그냥 흘러 나와요.

그런데 말씀을 듣게 되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중심입니다. 성전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칠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두 마리씩 상번제로 드리되 어린 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 양 한 마리는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28:3,4)

매 안식일에도, 매월 초하루에도, 유월절, 칠칠절, 대 속죄일에도 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말은 곧 흠 없는 분이 흘리신 피와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피로 인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 피를 전하는 삶입니다.

성도의 삶이 그렇습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도는 주님이 흘리신 피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자임을 확인하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이 이런 이유입니다. 말씀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