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53 낮에속한 자, 밤에 속한 자.

푸른 섬 2013. 12. 8. 21:51

낮에 속한자, 밤에 속한 자

로마서13장11-14

베드로후서3장3-5절을 찾아봅시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 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여기에 말세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들이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5절에서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3장에서는 세례요한이 이렇게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런데 이 천국이 어떤 모습인고 하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천국은 이렇게 심판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심판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심판 날로 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심판 날이 여러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오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자체가 마지막 날들입니다.

여기에서 인간들은 날들에 현혹이 되지요. 벌써 2천년이 흘렀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들이라고 말입니다.

날들이라는 것은 마지막임을 보여주는 날들입니다. 십자가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날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베드로 전서 3장3절 말씀입니다.

지금이 마지막 날들에 속하였는데 조롱하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주님의 강림,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하는 자들은 교회안과 밖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라는 말씀을 볼 때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4장17절을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라고 합니다.

예레미아15장29절을 보면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다면 베드로 전서4장17절 말씀도 동일하게 보아야 하겠지요.

실제로 심판이라는 것이 교회에서 시작되었지요.

예를 들면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여서 죽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대표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신서들을 읽어 보면 교회에 심판을 하시는 말씀들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심판을 하시는 것을 볼 때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볼 것도 없겠지요.

고린도교회가 그 대표적이지요. 고린도 교회는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교회이지요. 교회 아닌 자들의 모임에는 이런 심판이 없습니다. 심판 없다는 말은 심판이 진짜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들이 받을 심판은 볼 것도 없이 엄중하다는 말씀을 교회를 통해 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심판을 받는 자들이 오히려 참된 교회가 됩니다. 즉 회개가 일어나지요.

마지막 날들의 특징은 주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그 기준이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런데 이 피로 용서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피 흘리신 분을 조롱합니다. 그분이 심판주이라? 우끼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합니다. 이게 교회밖에 있는 자들이 하는 말이면 당연하다고 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교회밖에 있는 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면 굳이 베드로후서에서 이런 말씀을 쓸 필요가 없잖아요.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자들, 복음을 순종한다고 하는 자들의 마음이 이러합니다.

강림하심을 믿는다고 말은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현실을 보면 강림을 믿을 수 없지요. 실제로 조상이 잔 후로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있지 않습니까? 노아 홍수. 누가 봤습니까? 못 봤잖아요. 제발 현실적이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신다. 그런것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갈까요? 지 마음대로 삽니다. 정욕대로 산다고 하셨지요. 베드로후서2장에 보면 호색이라는 단어, 탐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호색하는 것을 따르고,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는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마지막 날들을 사는 자들이 아니지요. 마지막인줄 알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와보니 마지막이 아니에요. 구원. 영생. 다 지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교회, 영생, 구원, 예수, 십자가, 피 이용해서 탐심만 채우면 된다는 겁니다.

왜? 마지막이 아니잖아요.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와 비슷한 말씀이지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이미 기름 준비된 자와 기름 준비되지 않은 자들은 갈라졌습니다.

이것을 두고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처럼 확실한 구원 속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화목재물 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님 오시면 틀림없이 구원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밤이 깊다는 말은 밤이 깊다는 뜻으로 보기보다는 성도에겐 밤이 지났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헬라어 proevkoyen가 동사 직설법과거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밤이 지났다가 되고, 낮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에서 가까이 왔으니 헬라어 h[ggiken 은 동사직설법 완료 능동태입니다. 따라서 이미 낮이다라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성도에겐 밤이 지났고 낮에 사는 자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어둠의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로마서에 나오는 이방인들이 행하던 일과 유대인들이 행하던 일들이 어둠의 일들입니다.

빛의 갑옷이란 전쟁개념입니다. 어떤 전쟁일까요? 이런 어둠과의 싸움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 아니면 이방인처럼 자기 탐욕대로 사는 것. 이런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과 예수님의 피와의 전쟁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3”

어디서 많이 본 말씀 아닙니까? 이렇게 살았던 자들이 이방인들이지요. 로마서 1장18-31절을 보면 나와 있습니다.

지난주 율법을 다 갖고 왔죠. 이제는 이방인들이 행하던 모습도 갖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4절을 봅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을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들을 보게 되면 우린 이미 낮에 사는 자들이니, 빛의 갑옷을 입고 단정히 행하자. 술 취하지 말고 음란하지 말고, 호색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시기하지 말고. 이렇게 살자라고 할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의 권능으로 강하여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모든 성결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뜻한다고 말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로 옷 입으면 ,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 이렇게 살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이것이 성도의 의무요, 이 의무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이렇게 해석해 줘야. 교회 다니는 맞이 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로마서 말씀 자체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지요.

율법을 주면 율법이 오기 전에는 내가 지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들어오면 나는 죽고 죄만 살아난다고 하셨지요.

이 말씀도 이 말씀에 기준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를 먼저 심판하고 계심을 우리들이 다시확인하게 됩니다.

이 심판을 받는 자들은 싸움을 하는 자들이지요.

그러나 이 심판이 없는 자들은 싸움을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기에 사는 자들입니까?

자다가 깰 때, 즉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싸움을 하는 자들입니까? 영적싸움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린 이 말씀 앞에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자임이 발각되어집니다.

우린 지금이 자다가 깰 때라고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우린 밤에 사는 자처럼 살고 있음이 발각됩니다.

아무리 방탕하지 않고 술 취하지 않고, 음란하지 않고, 호색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산다해도 오히려 나는 내 탐심대로 사는 자임이 오늘 말씀을 통해 발각됩니다.

우린 뭔가 반듯한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원하지요. 물론 겉으로는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자들은 말씀을 통해 책망을 받습니다.

성령의 책망이 주어지는 자들입니다.

심판을 경험하는 자들이 주님의 백성이고, 진정으로 빛의 갑옷을 입고 싸우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구원된 자들입니다.

성도는 시기를 아는 자입니다. 지금이 자다가 깰때 임을 아는 자입니다. 성도는 낮에 속한 자입니다.

낮에 속한 자는 오직 십자가의 피로만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밤에 속한 자는 십자가의 피로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들은 오직 정욕대로 살 뿐입니다. 그래서 방탕하고, 술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고 다투고 시기하며 살아 갑니다. 이들에겐 지금이 자다가 깰때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육신의 일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영에 속한 자입니다. 영에 속한 자는 로마서1장에서 11장에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오직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주님의 십자가만 중심이 됩니다. 왜냐하며 이들은 낮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밤에 속한 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에 관심 가질리 만무합니다. 이들은 육신의 일에 미쳐 있습니다. 그 일들 중에는 국가에 미치든지, 아니면 가정에 미치든지, 돈에 미치든지, 여기에 미쳐서 자다가 깰때라는 말씀에 눈낄도 주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신다고 해도 심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면 참으로 좋겠지만, 베드로 전후서나 로마서를 보면 이 말씀은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왜 사람들이 노아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만 관심을 두는지 아시겠지요. 이들에겐 심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이 없어요. 심판이 없다는 말은 곧 십자가의 피를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십자가의 피의 혜택을 입은 자라면 지금이 당연히 자다가 깰때임을 압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육신의 일, 즉 십자가의 피와 상관없는 일만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낮에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중심이 십자가의 피와 관련된 일만 합니다.

오늘말씀을 통해서도 육신의 일에만 관심있는 자들은 육신이 무엇을 해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지요. 이들은 구원에 미쳐 있는 자들입니다. 만일 오늘 본문 말씀대로 정욕을 위하여 살고 육신대로 살면 지옥갈까 겁나서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꼭 바리새인들 같아요.

성도는 오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왜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안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을 믿고 살고 있는지를 한번더 확인하는 본문입니다. 주님의 피 능력 만이 육신의 일만 도모하는 인생에게 낮의 인생을 살게 하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