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52 사랑은 율법의 완성

푸른 섬 2013. 12. 1. 21:35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13:8-10

오늘 본문은 율법의 완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율법이 나오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항상 무엇을 생각할까요?

로마서79절에서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율법이 자기 속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율법이 항상 자기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면 율법을 자신이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다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살았다는 말은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빌립보서3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뜻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마태복음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을 보게 되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줄 아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다고 대답을 합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율법을 대하는 태도는 율법이 자신 밖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주체가 되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근거로 자신을 보면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의 대답을 보세요. 얼마나 당당합니까? 우리 중에 이런 사람 있나요?

율법을 다 지킨 사람 있나요? 물어 볼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에서 다시 율법을 갖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율법을 갖고 나왔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게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읽어보면 율법은 폐기 된 것 같은 느낌을 주지요. 그런데 제가 설교할 때 율법은 폐기 된 것이 아니라 성도 마음속에 들어왔다고 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율법이 폐기 된 사람인고 하면 십자가의 피를 과거로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난 십자가의 피를 믿으니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 말입니다. 이들은 항상 부활을 강조합니다. 부활의 삶을 강조하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들고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을 들고 나와서 부활의 삶을 살자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즉 성화론 자들이지요. 이들은 성도가 십자가 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율법은 항상 무엇과 만납니까? 죄인과 만납니다. 계명이 이르니 죄가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탐심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성령 받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을 다 이룬 사랑을 말씀하시지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사랑의 빚만 지고 살아야 한답니다. 이건 율법입니까? 아닙니까? 바울의 말이니 율법이 아닙니까?

주님이 바울을 통해 하시는 말씀이지요. 이것 바울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심판주 되시는 주님입니다. 누가 이 말씀을 함부로 대합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이 말씀을 너무 쉽게 생각해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빚이 채무관계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금방 아실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채무관계가 아니잖아요. 돈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여기에 나오는 빚은 살면서 온갖 호의에 대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남들에게 빚지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그걸 우리들이 다 갚고 살아요. 그렇지 않잖아요.

우린 잊어버리고 살잖아요.

 

사실 사랑의 빚만 지고 살아라고 해도 우린 불가능하잖아요. 그런데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셨어요.

 

우린 빨린 뛰어 넘고 싶어 해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다고 했으니 남을 사랑해야지에 관심을 두려고 해요. 그런데 남을 사랑하기도 전에 빚 문제가 해결이 안돼요.

 

뿐만 아니라 남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간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탐내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계명을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732절을 보면 간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521절 이하에서는 살인하지 말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순서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순서를 아셨어요. 물론 살인과 간음의 순서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십계명을 모를까요?

율법을 외우는 사람이잖아요. 우리도 십계명 정도는 외우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십계명을 모를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로마서 139절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먼저 꺼집어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마태복음527절 이하로 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로마서 77절로 가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간음을 어떻게 규정하셨는고 하면 마음속의 음욕을 간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마음속에 음욕을 품지 않을 인간 없습니다. 없는 인간 있다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로마서를 찢어버려야 하겠지요.

 

사도바울이 율법의 완성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왜 십계명 율법 중 가장 먼저 간음하지 말라는 갖고 나왔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주님을 우리를 알아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할 때 인간들은 벌써 자신이 율법에 대해 어떤 인간인지를 잊어 버려요.

 

그래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 살인하지 말라, 두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특별히 언급하는 겁니다.

간음도 마음의 문제, 탐내는 것도 마음의 문제지요. 물론 살인이나 도둑질도 마음에서 일어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 아니지요.

 

특히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장 앞장세움으로 말미암아 로마서를 쓴 이유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율법이 오니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하신 계명들을 어긴다면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안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은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요한일서4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로마서도 나오지요.

 

로마서 4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것을 요한 일서 410절에서 하나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이랑 사랑을 베풀 자격이 있는 분이 베푸는 것이지 자격 없는 자가 베풀 수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니까 이웃을 사랑하려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말씀을 우리들이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겐 사랑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서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해요.

 

왜 그런고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의 후손들은 자신이 죄인이 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합니다.

자신도 반드시 하나님과 맞먹든지 아니면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올라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셨을 때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 버립니다. 예수님 이전까지는 율법을 안 지켜서 하나님께 멸망받았으니 이제는 율법 지키겠다고 다짐해서 율법을 지켜 버립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도 하면 할 수 있다는 태도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 그 율법 지킴이 지킴입니까 아닙니까? 아님이 드러나죠. 지금도 똑 같아요. 십자가의 피를 말하지 않으면 자신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해요. 이웃을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웃 사랑하겠다는 자들에게 물어 볼까요?

사랑 안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 있습니까? 모든 율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이웃 사랑이 됩니다. 이것을 알고 이웃 사랑하자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완벽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방종하면 안 되니 최선을 다하라고 주신말씀이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 이 말씀이 최선 다하라고 주신 말씀입니까? 방종하지 말라고 주신 말씀입니까?

로마서1장부터 읽어 왔다면 인간들을 뭐로 보는지 알잖아요. 인간은 없어요. 아담 안에 죄인들 밖에 없어요.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율법 지킨다고 우기는 죄인들 밖에 없고, 율법이 자기 속에 들어오니 죄만 살아난다고 고백하는 자 밖에 없어요.

 

세상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웃 사랑을 못하나요. 성도는 못하지요. 누가 이웃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이 하셨습니다. 성도는 주님이 이웃 사랑하셨음을 증언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참 이웃 사랑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사랑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잖아요. 누구를 위해.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이것이 이웃 사랑이고 이것이 원수 사랑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이웃 사랑을 했거든요. 어떻게 이웃 사랑했습니까?

멋진 설교 한편하고 돌에 맞아 죽었지요.

 

그 설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피의 복음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구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7:51-53

 

스데반 집사님이 이웃 사랑하신 분 맞죠? 그렇다면 그 사랑을 예로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게 이웃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은 스데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그 분이 주님이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을 전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율법의 완성인 이웃 사랑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 앞에 자신은 죄인으로 드러나지요. 그러면서 사랑은 십자가 사랑밖에 없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성도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이웃 사랑이 되어 버립니다.

 

무엇을 해도 자신은 아니고 주님이 하셨음을 전하는 자이기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