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48 평화하라

푸른 섬 2013. 11. 3. 19:02

평화하라

로마서1218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할 수 있거든 이라는 말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해 보면 만일 가능하다면 이라고 이해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18절을 어떻게 읽고 이해할까요?

화목하기를 애쓰라는 말로 이해하겠지요.

 

듣기에 참으로 좋은 말 아닙니까?

 

여기에서 화목으로 번역된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사실 성경은 화목으로 번역했지만 평화 혹은 화평으로 번역하는 것이 우리들이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화목으로 번역해 버리면 로마서 3장에 나오는 화목제물과 연결고리는 쉽게 되지만 문제는 평화라는 말의 의미와는 상당한 거리가 발생합니다. 평화는 화목제물 되신 주님의 피능력으로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427절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에 나오는 평안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평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이 평안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 평안은 결코 세상이 주는 평안과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집안사람이 싸우지 않으면 평안이 되지요.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생기는 평안해 집니다.

남편이 애를 먹이다가 그렇지 않게 되면 평안해 집니다.

전쟁하는 나라에서는 전쟁이 그치면 평안해 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사에는 평안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념무상을 평안한 상태라고 하고.

결국 세상에서의 평안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육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육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은 정신도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십자가의 피로 주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육을 입은 인간에게 어떠한 유익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죄용서 함을 받은 것이 육체에 어떤 평안을 줍니까?

죄책감이 살아진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평안을 줍니까? 이것도 역시 육체적 평안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평안을 얻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말씀은 거짓말이 되지요.

 

물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라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한 세트를 이룹니다.

 

성경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니라 늘 현재형이기 때문에 바울은 평생 이렇게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 땅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만 있는 평안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만 받는 평안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늘상 세상의 평안에 주님이 주신 평안과 쾅쾅 부딪히며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로마서 12장으로 돌아가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씀하신 말씀에서 , 화목이라는 단어를 평화라고 바꾸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면 이 말씀의 의미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의해 규정을 받기 때문에 이 평화는 세상에서 말하는 평화와는 전혀 다른 말씀이 됩니다.

 

십자가와 관련된 평화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모든 사람이 범죄한 자고 말씀 앞에서는 항상 죄가 드러나는 인간에겐 평화라는 말이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속제물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평안을 받은 성도에겐 그 받은 평안으로 인해 성도들과 평화합니다. 역시 이 평화도 세상에서 말하는 사이좋은 개념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여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이 현재화 되는 현장을 두고 평화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할 수 있거든 이라는 것의 의미는 조건적인 말씀이 아니라 절대적인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1:8절에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명령을 수행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엔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성령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로마서1218절을 보게 되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는 말씀을 사도행전 18절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다시 할 수 있거든으로 돌아가서 여기에 나오는 단어 dunatov" 뒤나토스는 야고보서 32절에도 나오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여기에 나오는 능히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할 수 있거든 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 했죠. 그렇다면 능히 온몸을 철저하게 제어해 갈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다와 온전한 사람, 그리고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운다는 말씀이 같은 의미이지요. 여기에는 조금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로마서1218절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면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해야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사도들이 모든 사람과 평화하지 않지요.

그러나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소식을 전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요.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겐 모든 자들이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평화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 납니까?

 

마태복음 1621-23절을 봅시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에 보면 사탄이 나옵니다. 누가 사탄입니까? 베드로입니다.

방금 전에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해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고 하니 목숨 걸고 십자가의 길을 반대하고 나섭니다.

 

이런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사탄이라고 하시지요.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과 사람의 일이 동일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일, 이것이 사탄의 일이고 사람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일은 정해 졌습니다. 십자가을 부정하는 것은 다 사탄의 일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다 사탄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을 이용해 목숨을 구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었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그게 됩니까? 안되지요.

우리의 삶이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 모든 인간은 사탄입니다. 사탄의 종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탄의 종을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문제는 의롭게 되지 못한 사탄의 종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십자가는 자신들에게 세상이 주는 평안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안을 원하면 이 평안, 돈 많이 벌고, 자식 잘되고, 건강하고.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들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평안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복음, 즉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것에 대해서 이들또한 물론 아파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몸은 세상이 주는 평안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평안을 받은 자들이기에 이들은 오직 세상이 주지 않는 평안을 전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이 주는 평안을 원하는 자들은 이들이 전하는 평안에 해서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물론 주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이 복음에 아멘하지요.

 

창세기127-28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이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사람들은 이 본문을 문화명령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데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습니다.

지금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 형상이 온 땅에 충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셨지요.

그러나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온 땅에 충만해진 것이 아니라 첫째 아담의 형상이 온 땅에 충만해 졌습니다.

첫째 아담의 형상은 철저하게 참 하나님의 형상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입니다. 왜 죽입니까?

자신들이 만든 평안,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72절을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참으로 우리의 상식과 다르지요. 왜 진멸,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라고 하십니까?

이것이 평화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겐.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평화를 원합니까 다른 평화를 원합니까?

다른 평화를 원하지요. 세상이 주는 평안을 원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다시 로마서로 돌아와 봅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셨지요.

 

우린 이 말씀을 이렇게 듣고 싶습니다. 그래요. 저는 모든 사람과 평화하고 싶어요. 그래서 원수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사이좋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화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더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평화가 우리 몸에 유익한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니 어떻습니까?

진짜 주님의 말씀과 만납니까? 그렇다면 탄식이 나오지요. 기도가 나오지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지요.

 

주님은 주님의 피로 구원하셔서 성도를 만드시어 이 싸움에 집어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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