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45 12장15절

푸른 섬 2013. 9. 22. 12:49

즐거워 하는 자와 우는 자

로마서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자나 맹자나 석가모니가 하는 말과 동일한 성질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어느 누가 들어도 동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 아닙니까? 공감 이라는 말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글을 여러분의 카톡같은 곳에 올려 보세요. 사람들이 싫어할까요. 좋아할까요?

남의 즐거움에 함께 즐거워하고 남의 슬픔에 함께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사람 됨됨이가 된 사람이지요.

 

우리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된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1215절 말씀을 액면가대로 설교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십시오. 우리는 자들과 함께 우십시오. 이것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아요 맞지 않아요. 맞지요. 그런데 맞지 않지요.

 

문제는 이 말을 하는 자나 듣는 자가 언제나 딴생각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는 제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일어났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말씀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자신들 몸 중심으로 이해했습니다.

 

창세기25장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했을 때 여호와께서 미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기라 하셨더라”23

 

참으로 애매한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별로 애매한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있는 당사자, 즉 이삭이나, 리브가나 에서나 야곱이 되었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우린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 별 어려움 없이 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2523절 말씀은 누가 하신 말씀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듣는 자들은 누굽니까?

이삭, 리브가, 그리고 에서와 야곱입니다. 물론 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들 부모들이 이야기 해 줍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알기 때문에 이삭은 누구를 좋아합니까? 에서를 좋아합니다. 리브가는 누구를 좋아합니까. 야곱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들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먼저 이삭과 에서 입장에서 보자면,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우리야 당연히 섬긴다는 표현이 나왔으니 에서가 야곱을 섬기는 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시겠지요.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누굽니까? 바로 리브가와 야곱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속여서 빼앗지요.

 

그렇다면 다시 이삭과 에서 입장에서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장자는 나다. 내가 큰 자니 작은 자 동생에게 봉사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db'[;아바드 라는 뜻은 노예가 되다, 종살이 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봉사하다, 보살피다라는 뜻도 있어요.

 

23절에서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라는 말씀에서 이 족속이라는 말씀이 누구를 지칭하는 지 명확하지가 않아요. 그러니 장자인 에서 입장에서는 당연히 강한 족속은 자신일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중심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말씀에 휘말려 버린 인생은 있어도 말씀 속에 자신이 뛰어 들어가는 인생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좀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형과 동생이 그렇게 싸우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게 만고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명확하게 말씀해 주어도 인간들은 역시 자기 몸 중심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결국 에서는 에서대로, 야곱은 야곱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대상이 아니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야곱입니까?

 

야곱도 아니지요. 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대상이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창세기32장을 보면 야곱이 부자가 되어 삼촌 라반 집을 떠나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노중이었습니다.

때마침 누구를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습니다. 마하나임.

그러니 야곱입장에서는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그곳에 형 에서가 있습니다.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지(27:42) 않고는 한을 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지요. 그야 말로 천군만마를 얻었습니다.

 

실제로 형은 사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에게로 오는 중입니다.

327절을 보면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하나님의 군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꾀를 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대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 나는 살아야 하고 축복을 받아야 하는 자라는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얍복 나루에서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합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25절을 보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라는 말씀이 나오죠.

 

야곱에게 졌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사실 이 하나님은 이전에 만난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싸움을 합니다. 놀라운 것은 야곱은 하나님마저 싸워 이겨버립니다.

 

야곱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국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야곱을 병신 만들어 버립니다.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제야 야곱은 축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야곱은 이미 축복을 받을 만큼 다 받았는데 무슨 축복을 더 원합니까?

이제야 야곱은 자신이 소유한 것이 축복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라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야곱은 지금까지 이기는 자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가 축복입니까? 저주입니다. 저주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몸 중심으로 말씀을 해석하지 않고 자기 몸이 죽은 몸이 될 때 비로소 말씀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이기심, 승리하심입니다. 승리하신 분이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시는 섬기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합니다.

 

하나님에게 한 대 맞아 죽는 것이 그렇게도 싫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서 말씀 지켜서 야곱이 받았던 그 축복을 받아 내려고 발악합니다.

 

이와 같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은 철저하게 에서처럼, 야곱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몸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안달나지 않습니까?

 

우린 별로 관심 없습니까?

 

이 말씀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갖고 사회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죠.

 

그러나 여기에서 즐거워하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1장을 보면 즐거워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 말씀은 빼버리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면 됩니까? 이건 반칙이지요. 지 마음대로 성경말씀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5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12절에 보면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바로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피 복음 때문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느 누가 십자가의 피 복음 때문에 즐거워 합니까? 바로 은사를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자들입니다. 그러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지키시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이나 사도바울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은

고린도 후서 14절을 봅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그러니 울부짖을 수밖에 없지요.

 

계시록717절을 봅시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여기에 보면 눈물이 나오지요. 이들이 왜 눈물을 흘립니까?

이들이 가진 하나님의 말씀과 이들이 가진 증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이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은 슬픔을 가진 자와 함께 슬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초상집에 가서 함께 울어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함께 울 수 있다는 것은 곧 그는 십자가의 증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떨 때 웁니까?

자기가 슬플 때 울지요. 자기감정에 복받쳐서 울지요. 그러면 언제 즐겁습니까? 자식 공부 잘 할 때, 말 잘 들을 때, 남편, 아내 속상하지 않게 할 때, 돈 많이 벌 때, 건강할 때 즐겁지요. 추석되면 가족들 다 모이면 즐겁지요.

 

이런 즐거움 아닙니다.

 

로마서53절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서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이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니 성도에게 있어서 즐거움이란 이 세상의 즐거움과 다른 즐거움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즐거움입니다. 환난 중에서 즐거움입니다.

 

성도의 즐거움과 울음을 근거로 심판을 감행하십니다.

 

그러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성도를 철저하게 이 땅에서 십자가의 증인으로만 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축복받은 주님 백성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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