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44 12장14절

푸른 섬 2013. 9. 15. 12:32

박해

로마서12장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eujloghvsa" -eujlogevw)하라 축복하고 저주katara'sqe-

kataravomai )하지 말라”

이 말씀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역시 예수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셔라고 생각됩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축복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느 누가 저주 받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으로 인해 사실 저주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적어도, 건강해도, 병이 들어도, 공부를 잘해도, 공부를 못해도, 자식이 많아도 적어도, 키가 커도, 키가 작아도, 자신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대통령이 되어도, 거지로 살아도,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하루 한 끼 먹지 못해서 굶어 죽어 가더라도, 모든 인간들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철저하게 저주를 외면합니다.

아니 아주 노골적으로 저주를 저주합니다. 반드시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저주라는 단어를 삭제해 버리려고 발악을 합니다.

그래서 땀을 흘리고, 노력하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만족이라는 것이 인간에겐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타인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이 가진 것이 더 많을 경우를 두고 자신은 적어도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뿐이지요. 자신보다 저 예쁜, 돈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다시 자신은 저주받은 자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저주를 없애려고 성형수술도 합니다. 아니면 매주 로또를 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는 말씀에서 박해하는 말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는 말에만 관심이 있지요.

왜냐하면 자신만은 꼭 축복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인을 향해 저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저주를 하게 되면 결국 자신도 저주를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사전에 자신에게까지 오기 전에 차단해 버립니다.

제발 저주는 하지 말라. 네가 듣기 싫은 소리를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 좋은 말들이 얼마나 많으냐? 왜 너는 유독 그렇게 나쁜 말을 타인에게 하느냐?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좀 인기 있다 싶으면 하는 말이 이런 말들이지요.

성경에도 있으니 목사라는 자들도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람들을 좋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좋게 하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말이 있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가장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단어는 ‘박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박해가 왜 발생합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미워하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까?

그것은 간단합니까?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예수님 당시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민중들 모두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왜 갸롯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먹었습니까?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축복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을 지지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들을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꿈, 자신들에게 주어질 축복이 사라짐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헤롯왕이나 본디오 빌라도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등은 예수님이 없어져야 자신들이 평소에 누리는 영광과 축복을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합니다.

박해가 일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주님이 되셔서 자기 백성은 구원하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지옥보내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천국은 어떤 인간도 자신이 원해서 들어갈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가고 싶다고 해서 지옥갈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 되신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1장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골로새서1:16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

천국과 지옥조차도 주님을 위해 창조 되었습니다.

선악과조차도 주님을 위해 만들어졌지요.

로마서11장32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러니 듣는 사람들은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왜 우리를 이스라엘로 불렀습니다. 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주님의 답변은 모든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져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해 그렇다고 답변하시지요. 이런 답변에 누가 동의하겠습니까?

로마서11장32절에 나오는 뒷부분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주님이 택한 백성을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미 로마서 11장5절에서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엇 하시려고요?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박해라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박해를 하더라도 축복하라고 하지요.

시편을 보게 되면 박해를 받는 자가 기도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시편1편을 보게 되면 악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망한다고 결론 냅니다. 로마서12장4절을 적용시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인들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까?

시편2편12절에서는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축복의 말씀입니까? 저주의 말씀입니까? 그러면 로마서12장4절에 의하면 핍박하는 자에게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으면 망한다는 말이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시편 3편7절 하반절과 8절을 보면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시편5편5절을 보면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시편6편10절을 보면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며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다 찾으려면 찾다가 설교시간이 끝날 것입니다.

로마서와 시편을 비교해보면 서로 일치하는 말씀입니까 아닙니까?

서로 일치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분명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윗은 축복은커녕 저주를 퍼붓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들이 로마서4장을 통해 다윗이 어떤 사람임이 드러납니까?

죄인임이 드러나지요. 다윗이 과연 자신의 원수를 저주할 자격이 있었습니까? 다윗 자신의 원수와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를 동일시하면서 시편을 썼잖아요.

사실 성경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최종적으로 다윗이 어떤 자로 드러납니까?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임이 드러납니다.

지난 주 제가 신명기 2장15절을 말씀드리면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 군대를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진영 중에서 다 멸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로 왕과 그 군대를 치신 하나님이 출애굽 하여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을 쳐서 멸하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활용하셨지요.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진정 여호와 하나님편인줄 알았어요. 사실 여호와 하나님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다윗을 사용하셨지요. 다윗 자신이 죄가 없어서 하나님 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자신 자신은 죄인으로 드러나고 결국 다윗조차 다윗언약에 종속되어져 버립니다.

로마서를 보게 되면 다윗도 죄인이요 아브라함도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선언하시는 주님의 말씀 속에 포함되지요. 이들은 결국 자신의 삶을 통해 증거한 주님 되신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 그 인생이 사용되어졌음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그 삶의 흔적 속에서 자신은 죄인으로만 드러나고 언약을 말씀하신 그 여호와께서 친히 그 언약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임을 증거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삶의 흔적이 시편이지요. 그 삶의 흔적 속에서 그는 언약의 완성자인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주님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여기에는 자신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자신의 원수를 운운한 것은 주님께서 다윗이 사울로부터 핍박받는 상황에 놓아 두셔서 시를 쓰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시편이 다윗 자신의 시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편임을 전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한편이 분은 아들 되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우리들이 기도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시편은 아들 되신 주님이 하시는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시편 말씀들이 집중적으로 인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말하는 다윗의 원수는 모두가 다 주님 되신 예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23장34절에서는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예수님께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시지요.

이 기도는 자기 백성을 위한 죄 사함의 기도입니다.

조금 전에 본 로마서11장에 나온 모든 사람을 불순종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여기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지신 주님 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원수들은 멸망당하고 주님의 기도에 해당된 자, 로마서에 의하면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자신의 피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예수님만이 이 땅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축복을 하셨지요. 죄를 사하여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사실 우리에게 해당사항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피로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요.

축복하고 저주 하지 않을 자격 있는 분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물론 적용됩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축복을 꺼내기 전에 박해를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 박해 받습니까? 그 이유는 십자가 지신 주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박해자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논리지요. 다르게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말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사도바울이 왜 박해를 받았습니까?

갈라디아서1장10절을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라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철저하게 자기 행위를 챙기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기 행위를 챙기는 자들을 인정해 주는 것은 곧 사람을 좋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3장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성도에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자신의 눈앞에 밝히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로마서 12장4절 말씀을 보면서 그래 나는 이제부터 나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할거야,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마음을 먹는 자체가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결심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서 뭔가 챙길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런 자들은 꼭 타인과 비교하지요. 나는 너보다 예수님을 잘 믿어 라고 말입니다. 이들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겐 이 말씀을 지킬 능력도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말씀은 말씀하신 분이 이루심을 믿으며 오늘도 박해 속에 거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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