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43 12장4-13

푸른 섬 2013. 9. 8. 12:06

한 몸의 지체

로마서12장4-13

4절 시작하는 부분을 보면 ‘우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즉 사도바울이 표현하는 형제들이지요.

그런데 우리라는 것은 분명 일인칭 복수인데 복수를 단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eJni; swvmati) 한 몸이라는 단수로 바꾸었습니다.

출애굽기4장22절에“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한두 명이 아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는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3장17절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장자, 아들이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스라엘이라는 군대를 만드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4장30,31절에서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들이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로만 아들, 장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적도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보여 주신 이적은 마귀와의 전쟁을 말씀하시는 이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적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장자다. 이제 우리를 괴롭히는 너희들은 다 죽었다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자신들을 괴롭히는 애굽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더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세를 자신들에게 보내신 이유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장자, 참 아들이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장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에게 불편한 일이 생기면 원망합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 됨이란 소위 말해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모세가 찾아 왔을 때 이들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니 여호와께 경배했겠지요. 그런데 자신들의 삶이 어려워지니 그 경배가 오히려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라는 말 자체가 이스라엘이 어떤 삶을 보일지 결과가 뻔히 나와 있지요.

민수기 14:22,23절을 보면 “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그러니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장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 낸 것입니다.

신명기2장14절을 보면 “가데사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 년 동안이라 이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출애굽기 6장26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장자인 이스라엘을 군대라고 부르십니다.

군대는 어떨 때 필요합니까? 전쟁할 때 필요하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쟁을 위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 어떤 군대를 멸하셨습니까?

출애굽기15장4절에서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애에 잠겼고”

진짜 군대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죠. 이스라엘은 구경꾼입니다. 증인들입니다.

원망하는 증인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장자로, 아들로, 군대로 부르신 것은 전쟁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 전쟁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한 전쟁입니다.

그런데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아들, 장자, 하나님의 군대가 누구에 의해 멸망당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직접 손으로 이들을 쳐서 멸망시켰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손으로 멸하셨다는 말은 이들은 여호와의 아들이다 아니다. 아니다가 됩니다.

전쟁하시는 여호와께서 애굽도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도 멸망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 아들, 장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15장11-32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자신이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첫째 둘째에게 돌아갈 상속을 다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둘째가 상속받은 재산 몽땅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재산은 다 날렸고 그 나라엔 흉년이 들었으니 어떻게 살게 될까요? 돼지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자신이 죄인입니다. 저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로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었습니다.

24절을 보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면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둘째 아들을 찾은 기쁨이 죽은 아들 다시 살아온 기쁨이랍니다.

이 소식을 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노하여서, 화가 나서 잔치에 들어가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권합니다. 동생이 살아 돌아왔으니 아버지와 함께 즐기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뭐라고 합니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비유를 보면 큰 아들도 천국갈수 있지 않느냐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15장1,2절에 나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둘째아들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갖고 계시지요. 예수님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죽었다고 살아 돌아온 자들로 보십니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첫째 아들로 보고 계시지요. 그런데 첫째 아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임을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 아버지의 기쁨에 오히려 분노가 일어나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아버지의 처신에 분노가 일어났다는 말은 곧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어도 자기 상속재산을 갖고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동생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큰 아들의 죄는 상속재산 갖고 집나가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고 돌아온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 속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시니 이들은 분을 냅니다.

분을 내는 이들에게 이 비유의 말씀을 알려주어도 이들이 깨닫습니까 못 깨닫습니까? 못 깨달아요.

참으로 독특한 장면이지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 하나님의 군대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당연히 환영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분내고 결국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심 아들, 장자, 하나님의 군대는 오직 예수님 한분 밖에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 의해 모두가 지옥갈 자들임이 드러납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이런 바탕에서 주님께서 새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로마서11장26절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죄를 없이함을 받은 자가 바로 온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로마서8장16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에베소서 6장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로마서6장13절에서 무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3장12절에서는 빛의 갑옷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인 군대와 이 군대는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군대는 오직 예수님의 피만 전합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를 한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예수님의 몸이지요.

에베소서1:23절에서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면 몸은 누구를 전하게 될까요?

예수님만 전하게 되겠지요.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습니다.

즉 하는 역할이 다 다르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역할은 내가 알아서 찾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들이 교회를 설교하면서 한 몸의 지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각각 맡은 역할대로 섬기십시오. 집사는 집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목사는 목사대로 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각자가 받은 은사를 제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은사를 개발하십시오. 찾아내십시오. 그래서 그 은사를 마음껏 사용하십시요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적용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런 것 아닙니다.

한 몸의 많은 지체를 언급하시면서 각각 맡은 역할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역할이라는 것을 은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은사라는 말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일을 해야지 자기가 일을 하면 예수님이 몸이 될 수 없지요.

복수를 갖고 단수를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전쟁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역할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항상 예수님 자신만을 전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전하실까요?

예수님께서 일하셨다는 말은 인간은 항상 어떤 자로 드러날까요?

그렇습니다.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아들, 장자는 예수님밖에 없음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예수님밖에 없음을 전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늘상 죽습니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습니까? 야구나 축구를 보면 화가 나고, 기분 좋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 시험 잘 맞으면 괜히 기분 좋은데,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될까요? 믿음이라는 것도 우리 기분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합니다. 누가 다스리는 자입니까? 교회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니 감독이나 장로나 목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 봅시다. 그러면 어느 정도 하는 것이 부지런함입니까?

열 명이면 열 명이다 부지런함의 기준이 달라요. 문제는 그것을 주님이 인정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언제까지나 인간들이 부지런하다고 평가를 내리지요. 주님은 언제 평가합니까?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러니 자기들 기준으로 부지런함을 결정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하시지요. 이게 내 마음대로 됩니까? 나에게 이익이 되면 악이 되어도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에 속하라고 하는데, 선이 무엇입니까? 항상 내가 기분 좋으면 선이고, 내 기준에 옳으면 선이 됩니다.

11절에 보면 “부지런 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돈 버는데, 자식 키우는데 게으르지 않고 열심이지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배우자 찾는데 열심이고.

12절에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죠. 자식이 좋은 대학가는 소망. 돈 많이 버는 소망, 사업 성공하는 소망, 좋은 아내, 좋은 남편 만나는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환난이 와도 참습니다. 또한 이것을 위해 기도에 항상 힘쓰지요. 그러니 말씀 앞에서면 우린 하나님의 아들 아니야. 우린 하나님의 군대 아니야. 예수님의 몸의 지체 아니야가 드러날 뿐입니다.

13절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내 쓸 것 공급하기 바쁘지요. 내 자식 쓸 것 공급하지 바쁜데 언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손 대접하기 귀찮습니다. 돈 되는 사람은 귀찮지 않아요. 아무리 귀찮게 해도 참고 또 참고 하지요.

우리를 한 몸의 지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의 특징은 나는 하나님의 장자가 아니다. 아들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를 고백하는 자가 예수님 몸의 지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장자는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밖에 없음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예수님 몸의 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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