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42 12장3절

푸른 섬 2013. 9. 1. 12:22

은혜

로마서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합리적인 예배가 무엇인지, 즉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 ,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제가 3절을 네부분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려면 어떤 상대가 있어야 할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시나요?

예를 들면 빨간 불엔 건너지 마라, 파란 불은 건너도 된다는 말은 누구에게 하면 알아듣습니까?

사람에게 해야 알아듣지요. 돼지에게 빨간 신호등이 켜지면 건널 수 없고, 파란 신호등이 켜지만 건너도 된다고 말해도 소용없잖아요.

3절 말씀을 보면 꼭 돼지에게 하는 말씀 같아요. 기분 나쁘다고요? 어쩔 수 없습니다.

목사들이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물론 자신들은 다 알아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아들을까요?

사도바울이 은혜를 받았다. 그 사도바울이 우리 각 사람에게 말한다. 그 말하는 내용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마라는 것이다. 그래 우리들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니 우리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자. 이렇게 사는 것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제대로 드리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액면대로 해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라는 것은 이미 로마서에서 제대로 설명해 놓았지요.

좀 번거롭지만 찾아보겠습니다.

은혜라는 의미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1장5,6절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6장1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5장20,21 절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17절“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5절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2절에는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4장4절에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3장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1장7절에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5절에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게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그리고 로마서12장 6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라고 말씀이 나옵니다.

15장15절에서는 “그러나 내가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장20절 하반절에는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본문들을 사도바울에게 적용해 봅시다.

사도행전9장을 봅시다.

1-5절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도바울에게 주신 은혜는 사도바울이 백지상태에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울일 때 그는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믿는 자를 받으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였습니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말은 곧 사도바울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만난 후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은혜라는 용어가 결코 이와 다르지 않지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량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 구원 속에 다른 모든 것들이 함께 셑트메뉴로 들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과 삶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구원 그 이후의 삶을 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마치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네 몸을 드리라는 말씀이 우리가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르치고 배웁니다. 물론 이미 구원받은 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이미 구원은 확보했으니 예수님을 믿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혹 당했지요. 아니 많은 사람들은 이런 가르침을 처음부터 원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씀대로 살지 못하지요. 자신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합니다. 노력을 다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분리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구원과 삶, 즉 십자가와 부활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속에 부활이 들어 있습니다.

로마서6장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곧 그의 죽으심을 전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의 죽으심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새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6장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구원 받은 자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다시 법아래서 살자는 주장밖에 안됩니다.

문제는 사도바울이 법을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품지 말고,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게 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 말씀이 사도바울의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이것은 분명 법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법아래로 집어넣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법아래 집어넣어서 은혜 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법을 주셔서 너희들이 과연 은혜아래 있는 자인지 법아래 있는 자인지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자만 알아듣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라고 하시지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이 어디까지입니까?

이것은 추상적인 것인데 어떻게 그 한계를 긋겠습니까?

사람들은 노력하지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지요. 그런데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라야 정답일까요?

7절을 봅시다. 섬기는 일에 대해 나옵니다.

어디까지 섬겨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이 아닐까요? 어느 정도 가르쳐야 믿음의 분량대로 한 것일까요?

위로는 어느 정도, 구제는, 다스리는 것은, 긍휼을 어느 정도 베푸는 것이 믿음으로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어느 정도 사랑해야? 어느 정도 부지런해야, 어느 정도 형제 우애해야, 어느 정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데 어느 정도 해야, 손대접을 어느 정도해야 믿음의 분량대로 하는 것일까요?

그러니 이 말씀은 처음부터 인간이 행할 수 없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단어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슬을 세 개 옮겨라고 하면 인간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가 추상적인 것입니다. 결코 정확하게 기준점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말씀을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6절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하지요.

주체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로마서11장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영광은 주님 스스로 돌립니다. 주님이 자신의 피로 모든 일을 다 하십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홀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로마서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돌릴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이런 사람을 육이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즉 일한 것이 없는 자, 더 나아가서 죄 중에 잉태되어 태어난 자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이 주님이 되셔서 주님 홀로 일을 하심을 전하는 자로 육을 사용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육을 갖고 끊임없이 주님되신 예수님,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로 성도를 살아가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보는 본문이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며 십자가 지신 분이 친히 이 일들을 하심을 믿는 믿음의 자리로 오늘 말씀이 우리를 이끕니다.

신명기4장에서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24

그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유대인들이 바보입니까? 아니지요. 우리보다 수준이나 의지력이 낮을까요? 아닙니다. 이 말끼를 못알아 들을까요? 아닙니다. 이들도 우리와 똑같이 덤벼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규례와 명령을 지키지 않는 모습으로 저주받는 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규례와 명령을 지켜 한 없이 오래 살고 축복받는 인생을 살기를 갈망하며 체험하는 중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로마서에서 말씀하셨듯이 죄를 조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전역사를 통해 속속들이 죄가 드러나지요. 종착점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유대인처럼만 해석한다면 이런 자는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살아가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죄가 발각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아니면 살수 없는 존재로 드러나는 자입니다. 또한 주님이 홀로 주님의 말씀을 이루심을 목격하는 자입니다. 물론 이 내용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입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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