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46 12장16절

푸른 섬 2013. 10. 6. 12:20

영적과 합리적

로마서12장16절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라 했습니다. 영적 예배를 말씀드릴 때 헬라어 단어가 합리적인 예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이 단어를 영이라는 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logikov" 를 사용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영이라고 해 버리면 각자 알아서 해석하는 것이 강합니다.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영적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지요. 그런데 영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의미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비적인 의미가 가장 강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가 성경말씀을 어떻게 제대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가를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의 성경해석은 십자가 중심이 아니고, 자신이 하루에 세 시간 기도하는 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듣는 사람들 어떻겠습니까? 십자가를 중심으로 성경해석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없습니다.

강의를 듣는 목사들이나 교인들의 관심은 하루에 세 시간 기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루에 세 시간 기도한다는 말을 함으로 듣는 사람들 기를 팍 죽여 버립니다.

왜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이런 말에 기가 죽을까요? 이런 것이 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1절에서 영적예배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런 죄인들이 기본적이 사고방식을 깨 버리기 위해, 오히려 이성과 논리적인 의미가 함유된 합리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이성과 논리적인 의미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성과 논리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말씀한 내용에 대한 합리적인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28장3-7절을 봅시다.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서 진 쳤더라.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옛날이나 지금이 다를 바가 없지요. 신접한 여인을 찾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번에 여러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곳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령한 것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왜 신령한 것이 필요합니까? 사울 왕에게 왜 신접한 여인이 필요합니까?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스라엘 땅에서 쫓아 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신접한 여인을 찾습니까?

사울 왕이 나름대로 여호와의 말씀대로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나라입니다.

사울왕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계시가 완성되기 전에는 꿈으로, 우림으로, 선지자로 여호와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시가 완성된 후로는 이런 응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 할 이유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신명기1장8절을 보면“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 할지니라”

그런데 이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33절을 보면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그런데 이스라엘은 32절에 보면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출애굽 세대들을 여호와께서 친히 손으로 경내에서 멸하셨습니다.

사울왕도 지금 이들의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한 왕이었습니다.

자신들도 다른 나라처럼 강한 나라가 되고 싶어서 싸움 잘하는 왕을 구했고 그 구한 왕이 사울 왕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신명기20장1절을 보면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2-4)

그러나 이미 사사시대를 지나오면서 말씀은 없고 오직 자신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말씀보다 사람들의 의견이 더 소중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수의 의견, 즉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왕을 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왕되심을 이들은 거부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왕을 주셨습니다. 그 왕이 바로 사울왕입니다.

따라서 사울왕은 다수의 의견,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원했던 그 왕입니다. 모든 인간이 왕을 원하고 있지요. 강한 힘을 원합니다.

각자가 원한 왕이 지금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사무엘선지자가 죽자 자신도 나름대로 말씀대로 산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접한 자와 박수, 박수는 남자 무당을 말합니다. 신접한 자는 여자 무당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남자가 되었던 여자가 되었던 모든 무당들을 쫓아냈습니다.

사실 이런 자들은 말씀에 의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출애굽기22장18절을 보면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라고 하셨습니다.

사울 왕이 이런 말씀을 모를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고 쫓아내지요. 나름대로 그 시대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최선이 어떤 최선입니까?

여호와의 응답이 없을 때 써 먹으려는 최선입니다.

지금 무엇과 무엇이 부딪힙니까?

말씀과 현실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전혀 무용지물입니다. 사실 말씀에 의하면 블레셋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지요. 말씀대로 살았다면 블레셋이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까? 전혀 될 수 없지요.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응답이 없습니다. 실상 여호와의 응답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응답이지요. 어떤 응답입니까?

사울왕 너는 내가 버린 왕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아멘하면 되는데 죄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선 지금 현재 상황을 해결할 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접한 여인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신령한 것을 원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 것을 지키고 싶다는 것입니다.

신령하다는 것도, 영적이라는 것도 결국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고 하면 자신이 살고 싶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장례 지내는 것도 아주 신령한 것 중에 하나가 됩니다.

중국장족들이 하는 장례 의식 중에 천장이라는 것이 있지요. 독수리가 시체를 뜯어 먹고 하늘로 높이 오르는 모습을 보고 영혼이 하늘로 오른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도 닦는 것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렇지 않고는 다른 해석이 나오지 않아요. 성경에 나오는 무슨 말씀이든지 다 신령하게, 나름 영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는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이것이 안되면 신령한 자를 찾지요. 바로 살아 있는 부처 말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공감이라는 단어를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공감을 뛰어 넘어 같은 마음입니다.

육신이 따로 있는데 마음을 같이 한다. 이게 가능한 말입니까?

어느 정도 해야 가능한 말씀입니까? 인간들이 거저 흉내를 낼 뿐입니다.

어느 인간치고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는 인간 있습니까?

고승이라고 하는 자들을 보면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낮은데 처하는 것이 오히려 높은 자리가 되어 버리고,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지혜 있는 자가 되어 버리는 세상 아닙니까?

지금 로마서12장16절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사람들은 자꾸 자기 자신이 육적인 인간으로 노출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로마서1장에서 11장을 보게 되면 이미 인간은 없고 죄인만 있지요. 그 죄인에게서는 죄 밖에 흘러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죄인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죄를 용서하시고 죄용서 받은 자로 살게 하십니까?

그래서 자신이 죄 용서함을 받은 자임을 늘 전하는 자로 살아가면서 주님이 누구신가? 화목재물 되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서 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12장16절 말씀은 우리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참으로 고상하게 살아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성불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신령한 것으로 처리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이 말씀 앞에서 성도가 어떤 자임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죄인임을 드러내는 말씀이 바로 로마서12장16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미 알고 있습니까? 말씀은 말씀하신 분이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왜 자꾸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할까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자신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울 왕을 통해 보았듯이 어떤 인간도 말씀을 지킬 인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12장16절은 신약성경 아닙니까? 성령받은 사람이 지킬 수 있는 말씀아닙니까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25절에서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죄의 법을 섬기는 자로 노출되는, 발각되는 자로 살아가는 자가 성령 받은 자입니다.

이런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로마서12장16절 말씀을 신령한 말씀으로 해석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나도 신령한 자로, 성령 받은 자로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다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십자가의 피가 소용없게 됩니다.

죄인들이 꿈꾸는 신령한 세계는 바로 십자가 피를 제거하는 세계입니다.

합리적인 예배라는 것은 바로 말씀 앞에서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합리적인 예배, 즉 영적인 예배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신령한 예배를 꿈꿉니다. 자신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는 신령한 예배를 꿈꿉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도 자신이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노력해 봅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이 말씀대로 살 인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히려 이 말씀이 우리를 더욱더 죄인으로 만들어 내는 말씀임을 믿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말씀하신 주님이 홀로 이루어 내심을 믿습니다. 죄인의 몸을 갖고 말씀을 이루어내십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이루어 내시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주님이 하신 일임을 믿습니다.

이런 자를 주님께서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사람은 오히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자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칭 신령한 자들이 보기에 진짜 영적인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보겠습니까?

세상에서 신령하다 하는 자들로부터 멸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자들이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들이 바로 서로 마음을 같이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들이 바로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데 처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들이 바로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이 말씀의 능력 안에 사는 합리적인 예배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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