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50 숯불 쌓기

푸른 섬 2013. 11. 17. 18:16

숯불 쌓기 로마서 1220-21

지난 주 우리들은 원수 갚는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수의 문제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원수 갚을 수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을 먼저 할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가 누구냐를 먼저 생각해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원수는 뱀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원수의 모습은 이스라엘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이방민족들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원수이자 이스라엘의 원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이스라엘도 누구의 원수가 됩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이들이 멸망당했다는 것은 이들이 곧 가나안 족속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복수 대상들이지요.

 

이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사백여년을 보낸 후 예수님께서 유대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원수이며, 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원수인지가 비로소 완벽하게 밝혀지게 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유는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고 오히려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천국잘 가고 있는데 방해하는 방해꾼이었습니다. 민족의 평화를 훼방하는 훼방꾼입니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끊임없이 건드립니다.

 

예수님을 이들을 죄인이라 규정하십니다. 자신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바리새인이나, 경건하게 살아가는 쿰란공동체나, 하나님의 의지 하여 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라는 자들에게는 그야 말로 기분나쁜 소리입니다.

물론 제사장들도 정치적 힘에 결합하여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자신들을 죄인이라 하니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오늘날로 표현하면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예배 빠지지 않고, 십일조 잘하고, 구제하는데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 죄인이라고 합니다. 내 살과 내 피가 너를 구원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이 어떨까요?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지요.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몰라요. 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수대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형제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로마에 있는 형제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미 이들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다 읽은 상태입니다.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상태에서 이 말씀이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을까요?

 

우리는 생각합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제대로 알아먹은 사람은 이 말씀이 그런 식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의 원수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자신이 주님의 원수였지요. 그런데 주님의 피로 구원받았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이 어떤 식으로 들릴까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원수 갚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원수 갚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원수를 친히 갚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이런 말 할 필요가 없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렇다면 복음 전하다고 핍박을 받아 원수가 발생되는 자체가 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복음 전한 자가 주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꼴이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원수를 사랑한다면 복수할 마음이 생길까요 안 생길까요? 더 나아가 원수 자체가 없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원수도 있고, 원수 갚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것은 복음 때문에 핍박받는 성도가 오히려 주님의 원수로 등장하는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원수를 상대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원수니, 복수니라는 것이 생긴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주의 자리에 앉겠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린 이 말씀을 통해 한 번 더 우리가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으면서, 고난을 받으면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십자가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20절에서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고 하십니다.

 

먹여주고, 마시게 하는 것은 이미 원수라는 말입니까 아니라는 말입니까? 아니라는 말이지요.

만일 원수에게 이렇게 한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말이잖아요. 지금 이런 행위는 원수 사랑이잖아요.

 

만일 마실 것 주면서, 먹을 것 주면서 너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더 많이 받을 거야라고 해 버린다면 이것이 어떻게 사랑이 됩니까? 원수 사랑이 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축복이 될 수가 없잖아요.

 

성도는 항상 사랑만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항상 축복하는 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랑이며 무엇이 축복입니까?

 

그 내용이 로마서1장에서부터 11장을 읽어 보면 나와 있지요. 그분의 피가 축복이며 그분의 피가 사랑이지요.

주님의 피를 전하게 위해 부름 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즉 주님의 증인입니다. 성도는 오직 주님의 피를 전하는 축복을 전하는, 사랑을 전하는 증인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위협이나 고난이나, , 죽임이 온다 해도 자신이 복수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수는 주님만이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주님의 피로 주님 편에 세워 주셨기에 주님의 원수를 성도의 원수로 동일하게 보시지만 주님은 결코 주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도록 원수들과 만나는 자리 속으로 자꾸 내몰리게 되고 원수가 만들어지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십니다.

 

여기까지가 19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20-21절을 보면 이 말씀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미워하는 것입니까?

지금 성도들이 축복을 하고, 사랑하는 것, 즉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원수들에겐 어떤 역할을 하게 됩니까? 오히려 심판을 더욱더 가중시키시는 역할이 됩니다.

 

사도행전923-25절을 보겠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리니라

 

여기에서 사울의 원수가 누굽니까? 유대인들이지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주님을 만난 사울이 다메섹에서 즉시로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그러자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당혹하게 되었습니다.

 

자신 편에 있던 사울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바울은, 사울이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사도바울이 원수를 사랑했어요. 미워했어요?

 

광주리타고 도망갔죠?

이게 원수 사랑입니다. 도망가는 것. 복수하지 않잖아요.

 

다메섹 유대인들은 몰라요. 그러나 사도바울이 도망감으로 주님의 원수들 머리엔 숯불이 쌓여집니다.

 

사람들은 자꾸 말씀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으로 들어가 적용해 보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사도행전1350-52절을 봅시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이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니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지만(48) 그렇지 않은 자들은 이들을 쫓아내 버립니다.

 

이들이 누구의 원수입니까? 주님의 원수들이지요. 사도바울과 바나바의 원수잖아요.

로마서대로 하려면 이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014절에서 하신 말씀대로 행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셨지요.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는 자체가 이들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꼴이 됩니다.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는 것은 이들의 진노가 차곡차곡 쌓인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땅의 이야기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원수를 사랑하여 원수도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 말씀을 보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이란 원수들에게 진노 받을 이유를 확실하게 하나하나 더해가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이웃사랑종교라는 그런 거짓말에 속지 마세요. 그렇지요. 기독교는 그렇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결코 이런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들이 왜 원수 사랑과 원수의 구원을 논할까요? 저들의 관심은 하나입니다. 사람입니다.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원수조차도 구원시키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세상 만물이 그를 위하여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러니 세상 만물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은 원수 사랑이 원수 구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원수 사랑이 원수의 지옥행을 더욱더 확증짓는 것으로 봅니다.

 

이런 생각은 감히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결단코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의 선, 악이 아닙니다.

 

악은 항상 사람중심입니다. 선은 항상 십자가 중심입니다.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악입니다. 그러나 선은 십자가 지신 주님 되신 예수님이 선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생각이 곧 악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다고 할 때 베드로가 무슨 모습을 보여줍니까? 사람의 모습, 즉 사탄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십자가의 피를 거부하는 베드로가 바로 사람이요 사탄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라고 성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일로 인해 원수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 속에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에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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