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54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도다!

푸른 섬 2013. 12. 22. 20:04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로마서141-7

요한12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성경을 읽게 되면 우리가 기분 나쁜 게 있어요. 뭐가 기분 나쁜고 하면 방금 읽은 요한1215절 같은 말씀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무엇으로 규정합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과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입니까?

주님이 좀 심하게 말씀하시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도 있고, 쓸 만한 것도 있고, 귀한 것도 있는데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지.

자식을 키우는 부모마음은 그래도 인정해 주셔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아니면 부부가 사랑하는 것은 인정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연인이 있으면 연인이 서로 좋아하는 것은 그래도 나쁜 것은 아니잖아요.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지구상에 있는 어떤 것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님을 믿으니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피를 믿는 다고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돈도 벌지 않고 결혼 하지 않고, 자식 양육하지 않고 삽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직장도 다녀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시험도 쳐야 하고, 커피도 마셔야 하고, 과자도 사먹어야 살지요. 그리고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이 모든 일이 누구로부터 나옵니까? 우리 육신의 몸에서부터 나옵니다. 이 모든 일이 이 세상에 속하여서 행해지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어디에 속할까요?

육신의 정욕입니까 아니면 안목의 정욕입니까 아니며 이생의 자랑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셨으면 이 세 가지 중에 하나에 이 모든 것들이 포함됩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누가 벗어 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은 꼭 이런 말을 해요. 난 예수님을 믿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말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지 않는 인간들은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너무 가볍게 넘기지요. 이들은 성령을 받아 본적이 없으니 자기 죄를 몰라요.

15절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 말씀을 들으니 이제 동의가 됩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자식 키우고 밥하고, 청소하고 , 돈 벌고, 하는 것들은 다 뭐가 됩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는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놀라운 말씀을 하시지요.

그런데 어느 누가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 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러니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누구 안에 집어넣고 보시겠다는 겁니까?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 넣고 보시겠다는 겁니다. 즉 언약 안, 다르게 표현하면 피안에서 성도를 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빛 가운데서 산다고 우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자라고 하고,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많지요.

9-11절을 보면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그러니 자신이 형제를 사랑한다고 주장해야만 자신이 빛에 거하는 자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처음에 살펴본 216절을 보면 빛에 거하는 인간 하나도 없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열 받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요. 왜 그들이 분노를 낼까요?

자신은 빛이랍니다. 자신은 형제를 사랑한답니다. 자신을 예수님을 믿는답니다.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까?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시시각각 다릅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빛에 비침을 받았다면 자신이 어둠임을 당연히 아는데, 빛에 비춤을 받지 못했으니 자꾸 자신은 과거엔 어둠이었는데 지금은 빛 가운데 거하는 빛이라는 겁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우기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소금이나 빛은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식의 소금, 빛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빛 앞에서 어둠임을 인정하는 것이 빛이요 소금입니다.

그러니 요한1216절 말씀 같은 것을 읽게 되면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로마서147절을 봅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 뜨끔하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성도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답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되어 라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는 당연히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 이 말씀이 나왔습니까?

로마서64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기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새 생명 가운데서서 행합니다. 이 행함이란 곧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는 모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41절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자들이라면 이런 문제가 발생되면 됩니까 안됩니까?

목사들이나 교인들은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만일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겁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이런 말씀합니까. 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 말씀을 믿음으로 보지 않고 행위로 보는 자들은 말씀이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이것을 보면 꼭 누구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까?

다니엘과 세친구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채소와 물만 먹었어요.

사도바울이 다니엘을 모를까요? 당연히 알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다니엘과 세친구가 믿음이 연약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로마서147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하셨지요. 다니엘과 세친구가 그러했습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보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누가 더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까?

우린 당연히 모든 것을 먹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모든 식물을 주님이 주셨으니 난 아무거나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모든 것을 먹는 자는 자신이 주님이 주셨으니 먹는다고 하면서 먹지 못하는 자를 어떻게 봅니까? 업신여깁니다. 아이고 믿음이 없구나. 제발 믿음좀 가져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먹지 않는 자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먹는 자를 비판합니다. 그 음식은 우상의 제물인데 먹으면 되느냐? 안된다고 비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머리 좋은 인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음식을 먹더라도 못 먹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그리고 채소밖에 못 먹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고 삽시다고 결론을 내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로마서1장에서 11장까지 그렇게 거창하게 써놓고 이렇게 결론 낸다면 로마서1장에서11장 쓸 필요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4절을 보세요.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세우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음식을 먹고 못 먹고도 누가 하셨습니까?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디 감히 누구를 비판하느냐 입니다.

그러면서 예를 하나 더 들지요.

날에 대해서.

5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 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이 당시 여전히 유대교 영향이 있었으니 안식일이나 아니면 월삭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월삭이 더 중요하다. 아니면 안식일이 더 중요하다, 아니며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든 날이 똑 같다. 어떻게 더 중요한 날이 있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모든 것을 주님이 이렇게 하게 하셨고 주님을 위해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라라고 하십니다.

성도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성도는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앞서 모든 것을 먹는 자가 먹지 못하는 자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겁니까?

채소만 먹는 자가 모든 것을 먹는 자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겁니까?

아니면 날을 중히 여기는 자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자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겁니까?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자가 어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겁니까?

이런 것들이 다 이생의 자랑 거리입니다. 육신의 정욕이지요.

분명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었고, 채소만 먹을 수 있었는데 이것이 이생의 자랑거리로 바뀌었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것도, 모든 날을 동일하게 여기는 것도 성령의 역사인데 이것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바꿔치기 했습니다. 타인과 함께 거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라는 곳에서 성령의 은사조차도 오히려 죄로 드러납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십자가의 증인으로 삼았습니다. 완벽한 인간 만들어서 신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교회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 생각엔 교회를 주님께서 머리로서 일을 하신다면 완벽한 모습, 이상적인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이게 사탄이 준 생각입니다.

주님이 주님의 몸을 만드신 이유는 머리면 전하라고 몸을 만들어 놓으셨어요.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죄가 흘러 나옵니다. 죄가 흘러 나오면 주님의 피만 전하도록 하시지요.

이것을 두고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예를 들었지요. 혼자 신앙생활하면 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함께 하시지요. 그런데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어떻게 될까요?

헌금을 해도 비교하고, 성경을 외워도 비교하고, 기도를 해도 비교하고, 설교를 들어도 비교하고, 이건 막을 수 가 없어요.

그러니 서신 서들을 보면 모두가 다 잔소리잖아요. 완벽한 교회가 없잖아요. 책망하시잖아요.

 

이런 책망을 듣는 자들이 바로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린 세상에 속하여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로 끊임없이 드러나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비교한다는 자체가 세상의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잖아요.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한다면 왜 비교가 됩니까? 오히려 감사가 나와야지요. 그래서 문제 많은 성도를 어디 쪽으로 몰아 가시는고 하면 십자가의 피로 몰아가셔서 감사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이 순간 성도는 아무 비교가 없습니다. 물론 이것도 몇 초 못갑니다.

그래서 이 과정을 두고 주님은 어떻게 보시는고 하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