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55 사나 죽으나 주의 것

푸른 섬 2013. 12. 30. 22:07

사나 죽으나 주의 것

로마서148-12

셀리케이건 이란 철학자가 있습니다. 현재 미국예일대 교수입니다.

이 사람은 죽음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은 주어진 시간에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일까를 찾아 그 삶을 사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러면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잘 돌보는 것,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둘째는 풍부하고 값진 경험으로 내 삶의 그릇을 많이 채우는 것 마지막으로 나 혼자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 힘든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랍니다.

그러면서 인간을 영혼 없는 경이로운 기계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여러분은 이 셀리케이건 교수의 주장에 동의가 됩니까 되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 사람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심판을 믿고 있잖아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히브리서927절 말씀을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왜 돈을 버나요? 오 자식교육 하나요? 왜 집을 구입하고, 장래를 준비하나요? 왜 교회에 나오나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여러분들은 생각하고 행동을 하나요?

그리고 삶의 목적에서 두 번째로 이 사람은 풍부하고 값진 경험으로 내 삶의 그릇을 많이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 말에 동의가 되지 않나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도 그러지만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들이 여러분들의 삶의 그릇에 가득 채워져 있지 않아요? 그것이 여러분들의 행동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하지 않나요?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 이것은 사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겐 별로 관심이 없지요. 자기 행복에만 미쳐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 시대에 인기 있는 강사인지 모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모든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본성을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그가 원하는 세상 즉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런 주장을 하는지 모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죽음을 부정하는 이 사람의 주장을 한 마디로 웃긴다고 해 버릴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들이 지금 직장 다니고, 자식 낳고, 자식 키우고, 집을 장만하고, 살림을 장만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이 사람이 말하는 첫 번째 두 번째 삶의 목적에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부정하는 사람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런 사람에게 묻습니다. 왜 직장다닙니까? 왜 자식 교육시킵니까? 왜 밥먹습니까? 왜 돈 법니까?

왜 사람들을 만납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거짓말도 잘하지요. 돈 없이 못사는 인간 주제에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번다고 하니 말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고 하셨는데, 돈 사랑하지 않는 인간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 돈 사랑하지 않습니까? 돈 사랑하지 않으면 그 돈 다 내 주세요. 이 설교를 보는 분들 중에 혹 그런 사람 있으면 돈 저 다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저 목사는 돈 밝히는 사람이다라고 하시겠지요.

돈 밝히지 않는 목사 어디 있습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흉내 낼 뿐이지요.

결국 우리들은 셀리케이건 교수의 말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런고 하면 우린 첫째 아담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셀리케이건이란 사람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죄인입니다. 그 죄인이 내 뱉는 말이 곧 우리의 말입니다.

라멕의 말을 아시지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 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4:24

이런 말을 한 라멕속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라멕속에 누가 살고 있는고 하면 바로 앞서 언급한 셀리케이건이란 사람이 들어 있어요.

이 사람은 누구의 지배가 없어요. 자신이 지배자입니다. 라멕이 그렇지요.

라멕은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에 있지요.

그러니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린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이게 중요합니다.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다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당장 이렇게 말합니다. . 저는 주님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주님의 지배를 받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답변합니까? 앞서 말한 대로 저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합니다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먹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해 먹습니까? 자식 키우는데 누구를 위해 자식 키웁니까?

돈을 버는데 누구를 위해 돈을 법니까?

이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의 의미를 전혀 몰라요.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돌릴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누구와 만납니까? 바로 셀리케이건 교수와 만납니다. 셀리케이건 교수의 주장이 이것입니다. 독립된 존재라는 것이지요. 독립된 존재가 사라질 뿐이라는 겁니다.

영혼 없는 경이로운 기계라고 했지요. 바로 자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여기에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는 사상이 담겨있어요.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말을 누가 합니까? 영혼 없는 경이로운 기계가 하잖아요. 그러면 누가 영광을 돌립니까? 영혼없는 경이로운 기계가 돌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신앙이 이런 신앙입니다. 정말 영혼 있는 경이로운 기계지요.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말합니다. 물론 말은 주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이들은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며 무엇이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이들이 내뱉는 하나님의 영광은 항상 무엇과 만납니까? 인간의 행위와 만납니다. 인간의 행위와 만나게 되면 어떤 꼴 당하는지 아시지요?

요한계시록20:12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속 볼까요?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 자들이 누군지 봅시다.

13-15절입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자들은 행위책에 기록된 자들 밖에 없어요. 행위책은 권수가 좀 많아요. 행위가 일일이 기록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생명책엔 이름 밖에 없어요. 이들은 행위가 없어요.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만나지 않는 행위는 모두가 다 행위책에 기록됩니다. 이런 자들은 항상 자기 행위를 자랑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이런 삶을 살았고 이런 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이 어린양의 피와 만나지 않는 별개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즉 피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양의 피 속에서 사는 삶, 행위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 능력으로 분리된 삶을 강조하지요.

오늘 본문8절로 가봅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말씀은 확정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내가 노력해서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것이 누구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지요.

로마서8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의 증인으로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가 주를 위해 죽겠다 살겠다가 성립이 안 됩니다.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헬라어에서 능동으로 해 놓아도 로마서 전체말씀에서 보면 이 말씀은 수동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이것은 확정된 상태입니다.

9절을 봅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여기에 또 한 번 말씀하시지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다.

주라는 말씀은 홀로 일을 다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11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에베소서110-12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주님 홀로 일을 다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드러냅니까?

다르게 표현하면 어떻게 성도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됩니까?

로마서1410-12절을 봅시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마치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를 두고 심판하신다는 느낌을 받지요. 그런데 이미 우리들이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살펴 본대로 성도는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왜 하실까요?

형제를 비판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까?

형제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까?

자신이 주의 자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따로 계시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형제가 형제를 비판해요. 형제가 형제를 업신여겨요.

이렇게 되면 주의 자리에 형제를 비판하는 자가 앉게 되고, 형제를 없신여기는 자가 앉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예상대로라면 교회는 이렇지 않아야 하지 않나요? 적어도 형제를 비판하지 않고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아야 하지 않나요?

이게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식입니다. 행위이지요.

그런데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은 율법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의 법이지요.

그러면 율법이 오면 우리 자신이 어떤 자임을 알게 됩니까?

내가 형제를 비판하는 자요 형제를 업신여기는 자로 발각된다고 했지요.

이렇게 되면 이 말씀 자체만으로도 십자가의 피와 만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라는 곳은 끊임 없이 그리스도의 피와 만남을 갖는 곳임이 드러납니다.

즉 죄가 노출되고 그 행위와 그리스도의 피가 만나 주님께만 영광 돌립니다.

완벽하면 우리생각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은 오직 피 흘리신 주님을 통해서만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이 얼마나 켈리세이건처럼 사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8절을 다시 봅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사는 자체가 그분의 피를 전하는 삶이요 죽음조차도 그분의 피를 전하는 죽음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입니다. 죽음 안에 놓인 삶이라는 것은 곧 죽음밖에 보여 줄 수 없는 삶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죄밖에 남기는 것이 없지요. 주님은 이 육을 사용하셔서 그 십자가의 은혜와 영광을 마음껏 증거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