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6

푸른 섬 2014. 9. 14. 18:53

 

불합리하고 미련한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1:21-25

얼마 전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두 날개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평가를 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프로그램은 6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일 단계는 삼사명이 팀을 이루어 관계전도를 하고, 이 단계는 전도된 사람을 지극 정성 섬겨 교회에 정착하게 하고, 삼단계는 양육을 하는데 영육의 치유와 회복, 구원의 확신, 사죄의 확신, 기도응답의 확신, 인도와 승리의 확신, 묵상의 시간을 가지게 합니다. 또 성령세례, 충만을 경험하게 하여 신앙인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일꾼으로 양육합니다. 사단계는 제자훈련 한 학기를 마치고 열린 모임 지도자로 세웁니다. 오단계는 복종하는 삶과 인도자의 삶을 감당하도록 만들고 육단계는 재생산 사역자로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이 훈련이 마치면 재생산하는 제자가 됩니다.

 

들어 보니 설득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설득력이 있지요. 이 동네 교회도 목장으로 하는 교회가 있어요. 그 모임도 이와 비슷해요. 제가 그곳 세미나에 가서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께 강의를 직접 들어보니 참으로 설득이 되고, 그렇게 하면 전도할 수 있고, 계획대로 교회를 끌어 갈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론 이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프로그램을 들어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과연 성령님이 우리 손에 의해 움직일까요? 주님이 나의 계획에 따라,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까요?

 

성령충만받은 사도바울 자신이 가진 프로그램대로 성령께서 움직였습니까? 로마서15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로마 방문 계획을 말하지요. 로마서는 고린도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 전부터 스페인으로 갈 계획이 있었는데 그곳을 가는 중에 로마에 들릴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스페인으로 가는 도중에 로마 성도들을 만나 기쁨의 교제를 나눈 후 로마교인들이 스페인으로 파송해 주는 것이 사도바울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에 못 갔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도 죄수 된 신분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분명 사도바울을 스페인으로 갈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로마에서 끝내셨습니다.

 

사도행전1장에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그런데 성령의 일을 사람이 개입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게 하시겠답니다. 어느 누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알아서 자발적으로 땅 끝까지 증인이 되겠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그는 자신이 말씀에 순종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었다고 자기 자랑질을 할 것이 뻔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니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도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자기 백성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이루십니다. 이 말씀을 두고 어떤 목사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순종하지 않아서 박해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은 스데반이 설교 잘못했기 때문에 맞아 죽었고, 그 설교 하나 때문에 온 교회가 박해를 받은 것이 됩니까? 논리상으로는 맞지요. 그런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가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설교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시키신 일이지요.

 

눈이 보이지 앉는 주님의 행하시는 일이 믿어지지 않으니 모든 말씀을 사람의 언어로 이해하고 풀려고 하는 겁니다. 두 날개가 되었든 목장이 되었든 이것들이 왜 마귀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을 자기들의 종으로 부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로마서 1136절에서 말씀하셨지만 주의 영을 받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자신이 주체가 되어 얼마든지 지킬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저들의 논리를 들으면 얼마든지 수긍되고,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끌어 모으고 그 사람을 내가 부리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좋은 이론이 없습니다. 물론 이런 이론도 시대에 따라 자꾸 변화를 주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앞부분에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구원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육단계가 아니라 이십 단계를 만들어도 구원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구원을 확신시키고, 성령의 세례도 경험하게 한답니다. 이게 뭡니까? 자신들이 알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끝내 버립니다. 그 어디에 주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어떤 프로그램으로도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는 말씀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전도의 미련한 것일까요? 전도가 왜 어리석은 것일까요?

어떤 것을 어리석다고 합니까? 다르게 표현하면 너무나 불합리하다는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데 믿는 자가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논리를 적용시켜도 그 접촉지점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접촉지점이 가득해요. 그러니 그 프로그램대로 하려고 많은 교회들이 따라가잖아요. 내일부터 제가 사는 동네 교회에서 세미나를 한데요. 저보고 세미나에 참석하래요. 목사들이 왜 그런 곳에 귀를 기울입니까? 나도 저들처럼 해보면 저들처럼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지요. 합리적이라는 겁니다. 불합리한 이야기면 그것을 누가 듣겠습니까?

 

주님이 전도합니다. 주님이 구원하십니다. 여러분은 할 것이 없어요. 여러분은 죄만 지을 뿐입니다. 죄밖에 나올 수 없는 여러분을 이용해 주님의 자기 백성만 구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성경을 잘 설명해도 그것으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들의 질문에 대해 답변 잘한다 해도 그것으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것으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기도해서 그것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만 반드시 불러 구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받은 자만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것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라고 하시면 누가 세미나에 참석 하겠습니까? 그것도 돈 내고.

 

사람의 지혜가 없잖아요.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 가려며 사다리가 있어야 올라가잖요. 그런데 이건 유단잔가? 일층에서 반칙해서 이층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땅의 이층이야 점프하면 가능하지만 천국은 그렇지 않잖아요. 십자가는 누가 봐도 이것은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이야기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논리도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사다리가 없습니다. 매개체가 없어요.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이 가진 선악논리로 풀어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지요. 자신들이 팀을 꾸려 그렇게 접촉하여 관계 맺지 않으면 어떻게 전도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게 죕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만 있어라고 하십니다라고 하면 버럭 화를 내지요. 또한 내가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그래야 신앙인의 정체성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그게 마귀에게 속는 겁니다. 나의 확신이 구원을 해 줄 것 같으면 구원 못 받을 인간 어디 있을까요? 이런 식의 논리는 누구나 동의할만 하잖아요. 절에 다니는 장모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너거는 너거 믿고 나는 내 믿음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이게 맞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장모님께 장모님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믿게 해 주셔야 믿습니다라고 해 보세요.

 

교회 나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상대 기분만 나쁘게 하는 꼴이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 얻습니다. 교회 나오세요. 천국갑니다라고 가르치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교회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믿고 있나요. 앞서 언급한 프로그램을 보세요. 그 프로그램을 믿잖아요.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자신을 믿고 있잖아요. 교회 다녀도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를 믿어요.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면 십자가복음을 그렇게 싫어해요. 죄인이라고 하면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고 우겨요. 전도하는 죄인, 기도하는 죄인, 설교하는 죄인이라고 하면 너무너무 기분 나빠해요.

그들은 사람의 지혜로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22절을 봅시다. 유대인을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지요. 유대인은 왜 표적을 구할까요? 간단합니다. 과거 역사가 있잖아요. 모세가 그러했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표적을, 신호를 보여 주었잖아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다는 증거물을 보여주었잖아요.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표적입니다. 신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물입니다. 이게 어디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됩니까? 헬라인은 그렇지 않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전도하면 표적 보여 달라는 사람 어디 한 둘입니까? 보여 주면 믿겠다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이게 증거물이라고 보여주는 교회들이 많지요. 그러나 그 속 깊이 들어가 보면 구정물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그건 어쩔 수 없고, 지금까지 견뎌온 인생이 헛되니 그런 것은 덮어두고 가자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원한 것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신이 있다면 신이 있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데 그것이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어도 그들은 표적 자체만 수용했지 그 표적이 전하는 십자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원한 표적이란 자기들이 받아들이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표적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아담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만일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났다면 표적이라는 가시적 매개체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 했기 때문에 표적자체가 십자가보다 더 중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지신 주님이 믿음을 주셨지 표적이 믿음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매개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표적을 원하지요. 그 표적은 반드시 자신들을 살리는, 도움 되는, 이 땅에서 축복되는 표적이어야 합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지요. 그들의 지혜라야 우리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지혜 외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지혜 외에 무엇이 있을까요? 사도행전1721절을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합니다. 새로운 지식을 원하는 것은 신과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자신이 신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말속에는 복음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복음의 적용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의 내용만을 전하면 그 내용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론은 헬라인들이 얼마든지 수용할 만한 지식 속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알아듣는 이론이잖아요.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이것은 너희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하고 상대가 믿기만 하면 구원의 확신 속으로 끌어 들여 얼마든지 그 사람을 새로운 지도자로 세울 수 있다는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짓들이 모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짓거리고,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의 짓거리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다고 하지요. 우리가 다 할 수 있는데 주님이 하신다는 것은 필요 없지요. 내가 다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주님이 들어 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해 보세요. 뭐라고 할까요? 난 알아요. 라고 할 겁니다. 그거 우리가 다 믿는 거예요. 우리가 믿으니 이렇게 전도하고, 봉사하는 겁니다라고 하지요. 십자가의 도가 이렇게 무시당합니다. 어리석게 보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사람이 확인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사람이 하고, 사람이 확인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주님이 전도합니다. 주님의 피능력이 자기 백성만 살립니다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이렇게 반박합니다. 당신 몇 명 전도했어?

 

십자가의 도 안에 이미 전도는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함유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헬라인에겐 어리석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피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 그 피 흘린 분이 친히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고, 친히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하니 이러한 것을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 왔고 자신이 행해 왔는데 다른 외부의 주체가 개입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그래서 교회의 모든 것들을 사람의 일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사실은 성도들이 하는 일들이 다 주님의 일임을 전하라고 헌금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전도하게 하시는데, 인간들은 헌금이나 기도나 전도나, 봉사나, 성경 읽는 일이나, 학교 가는 일이나, 자식 키우는 일이나, 돈 버는 일을 모두 자기 일이라고 우깁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하나님 제가 잘했지요 라고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모든 일이 주님이 흘린 피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면서 날마다 그 일에 자기를 부인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분명 사도바울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그렇게 하게 하셨고, 그렇게 믿게도 하시고 그렇게 믿지 않게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날에 대한 어떤 예측도 그 예측대로 이끌지 않습니다. 사도행전218절 이하를 보면 가이사랴 지방에 전도자 빌립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처녀 딸 네 명이 있습니다. 네 명 모두 예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힐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 까지도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언을 들었다면 당연히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는 뜻인 줄 알고 가지 않겠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결국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전도라는 것을 왜 하게 하십니까? 왜 그렇게 미련한 전도를 하게 하십니까? 죽어라고 전도하게 하십니다. 전도라고 하면 살리는 일이요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이라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함으로 미련하다, 어러석다는 이야기를 들으라고 전도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믿는 자가 있어요. 믿음을 받은 자가 있어요. 심판과 긍휼의 주체이신 주님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무엇을 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행하면 전도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어요. 일을 주님이 하시는데 그런 소리가 어떻게 나옵니까? 자신이 주님이라면 자신이 계획하고 예상한대로 되겠지요. 그러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입니다.

 

지난주에 언약궤를 앞장세운 이야기 했었지요. 그런데 전쟁에도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패배했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패배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지요.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했는데 말씀대로 안 되었다는 것, 이것도 문제가 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언약궤를 빼앗긴 것은 누가 봐도 하나님을 더 잘 믿게 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믿는데 사업 망했다. 아니 돈을 너무 많이 벌어 부자 되었다. 자식이 공부를 너무 잘한다. 맨날 꼴찌한다. 어느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이런 상황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런 믿음은 다 짝퉁입니다. 주님은 나와 상관없이 주님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미련한 방식입니다. 그 상관없음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기도 각오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항상 전도의 미련한 방식에 사용되는 삶을 살려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전서 강해 8  (0) 2014.09.28
고린도전서 강해 7  (0) 2014.09.21
고린도전서 강해 5  (0) 2014.09.08
고린도전서 강해 4  (0) 2014.08.31
고린도전서1장 10-12  (0) 2014.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