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7

푸른 섬 2014. 9. 21. 17:31

노래제목: 언약을 어기는 자

고린도전서1:26-31

신명기3114-22절을 보면 여호와 작사 작곡한 노래가 나옵니다. 물론 곡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모세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불러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모세가 곧 죽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모세와 함께 회막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대체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그 아래 구절을 모른다 쳤을 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모세와 함께 온 여호수아에게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여호수아야 이제 곧 모세가 죽을 테니 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으로 잘 이끌어야 한다고 했겠지요.

 

여러분들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했을 때 자식들에게 무슨 말을 남기겠습니까? 절대 원수를 만들지 말고 하나님 말씀 잘 믿고 살아라고 하겠습니까? 믿음을 너무 좋게 보았나요? 아니면 남은 여생 예수님만 믿고 살아라고 유언하겠습니까?

 

자식 둘이 있으면 얘들아 너희들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살아라고 할까요?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면 재산을 잘 관리해라.

 

유언할 때 여러분들은 무슨 말을 남기겠습니까? 무엇인가 의미가 있고, 세상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유언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숨겨 놓은 재산이 백억이 있다는 식의 유언이 보통 유언이지 않습니까?

 

물론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에게 내가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라도 저주하겠다고 유언하고 자살 했답니다. 아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었으면 이런 유언을 남기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중보자 모세가 죽는 상황에서 여호수아에게 어떤 말씀을 남기실까요?

 

이제 곧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한 모든 출애굽 세대들을 죽이시는 기간을 그들이 가나안 땅 정탐 날수를 년수로 바꾸어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 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 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14:34)”

 

그러면서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 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14:35)” 고 하십니다.

 

말씀이 이상하지요. 사십년이 지나면 그때 가서 여호와께서 싫어하시는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 하셨지요.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모두 다 죽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여호와께서 싫어하시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겠습니까? 죽어도 모르지요.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만 압니다. 생존한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영생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압니다.

 

이와 같이 사십년이 흘러 이제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뭔가 좋은 말씀이 나와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노래제목이 심상치 않습니다. 제목이 여호와를 버린다입니다. 물론 제가 붙인 제목입니다.

 

신명기3116절을 봅시다.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애굽에서 여기까지 인도해 온 모세가 곧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런 식입니다. 듣는 여호수아 기분이 어떨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잘 지킬 것이라고 하셔야 모세도 편이 눈을 감고, 여호수아도 힘을 얻을 것이 아닙니까? 이건 초를 칩니다 초를 쳐요.

 

17절을 봅시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언약을 어기면 도리어 다독 거려 다시 언약을 지키도록 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우리들은 여호와께서 얼굴을 숨겨 그들이 삼킴을 당하게 하고 많은 재앙 환난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여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어디 그렇습니까? 재앙이 임할수록, 환난이 임할수록 더 삐뚤게 나갑니다. 아니 삐뚤게 나가게 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런 재앙과 환난이 임한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신 목적을 그대로 이룹니다. 그래 그래 너희들 생각에는 하나님이 없고 오직 우상만 있지라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인도해 들어가야 할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노래를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라는 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무슨 이런 노래가 다 있습니까? 우린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어기고 우상숭배 하네. 우상 숭배하는 중 우리는 환난과 재앙을 많이 만날 것이네. 우리는 언약을 어기는 자네. .

 

우린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노래를 부르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 때 경각심을 일으키고, 여호와를 잊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 까지나 니 생각입니다.

 

20,21절을 보시면 왜 노래를 지어 가르치고 했는지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아니 이럴 것 같으면 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합니까? 여러분 이런 반항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재앙을 줄 것 같으면 환난을 만나게 할 것 같으면 왜 굳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합니까?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생각은 항상 자기구원중심으로 말씀을 대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이 말씀이 기분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작사 작곡하신 노래를 부르면서 언약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야 뭔가 이야기가 되는데 이건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다 말씀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여호와께서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일까요? 정말 그 곳에 들어가면 핀란드처럼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늙어 줄을 때까지 편안하게 즐기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일까요? 이스라엘의 생각은 오직 하나 밖에 없지요. 먹어 배부르고 살찌는 것이 최고다라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좋은 것 먹고, 즐기고, 여유를 갖고 살며, 늙어서도 평안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최고라는 거지요. 이 땅에 살면서 이것보다 더 좋은 것 있습니까?

 

돈만 많아 보세요.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걱정 안합니다. 하나 차려주면 되잖아요. 백화점 하나 떼 주고, 자동차 뽑아 주고, 무슨 걱정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이런 이유입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죽어서는 천국가자는 식입니다. 그러니 잘 먹고 잘살게 되니 성경 볼 시간이 없어요. 텐트들고 놀러가기 바쁘지요. 어디 시간을 내어 말씀을 배우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러해요. 몸이 배부른 것을 좋아해요. 몸이 좋은 옷을 좋아해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도움을 주시지 않는 것 같아요. 분명 율법대로 살면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말씀은 무조건 싫어요. 좀 우상숭배식으로 하나님을 믿게 하시지 왜 그렇게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히셨는지. 그냥 우상을 섬겨 복 받는 방식이 맞춘 옷처럼 딱 맞아요. 그러니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돈보다 더 믿을 만한 것이 없잖아요.

 

여호와께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까? 그 이유는 너희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너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거하기 위해 그 증거물로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따로 있음을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면서 우상숭배하는 모습으로 증거하게 하기 위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겁니다.

 

그러니 복 받아 잘 먹고 잘 살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강성대국 만드는 것도 목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우상 숭배하여 재앙 받고, 저주받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희생자가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이 말씀을 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지혜로운 자도 있고, 능한 자도 있고 문벌 좋은 자도 많지는 않지만 조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다음 절을 보면 그런 식의 이해는 세상의 지혜를 갖고 이해하는 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합니다.

 

택한 받는 자들은 미련한 자들이요, 약한 자들이요, 천한 자들이요 멸시받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의 성도는 모두가 다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이해하는 사고로 생각하는 미련, 약한, 천한, 멸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내는 자라”(22:3)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이며 교법사이며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사도행전534절에서 말합니다. 빌립보서 36절에서는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로마 시민권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누가 보아야 떨어지지 않는 스펙을 소유하고 있지요.

 

만일 고린도전서 125절 말씀을 이 땅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사도바울 자신부터 문제가 발생해요. 그렇게 되면 나는 육체를 따라 지혜롭고, 육체를 따라 능하고, 육체를 따라 문벌 좋은 자인데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뭡니까? 그러면 고린도 교인들을 얕잡아 보는 것이 되며 자기 자랑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래서 여기에서 육체를 따라 라는 단어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자와 영을 따라 난 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서813,14절을 봅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육체를 따라라는 표현은 이 땅에서 통용되는 단어의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 어떤 육체라도 지혜롭다고 합니다. 자신이 능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문벌을 자랑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이 땅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거듭남을 이해했습니다. 어떻게 어른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바람이 임으로 불기 때문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되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믿고, 내가 받아들이고, 내가 순종해서 생기는 믿음이라면 얼마든지 수용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건 바람처럼 도무지 내 쪽에서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미련하다, 약하다, 멸시받는다, 천하다는 표현을 하는 겁니다.

 

다시 신명기 31장으로 돌아가 보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약속의 땅에 집어 넣으셨지요.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자들임을 노래가 증거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인간들을 언약 어김 속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방인들은 우린 언약 없는 데요 하겠지만 모든 인간들은 노아 언약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햇빛과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내린 다는 것은 너희들은 언약 어김 속에 살아간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나름 지혜 있고, 힘 있고, 강하고, 똑똑하다고 하는 자들은 결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직 주님만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자들을 언약 어김 속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그런데 육체에 속한 자들은 이것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나도 십자가 알고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데 내가 뭐 미련하냐? 내가 왜 천하냐? 내가 왜 멸시받아야 하느냐? 내가 왜 약한 자가 되어야 하느냐? 복음 아니 나는 이제 강한자야. 십자가 믿으니 나는 더 이상 미련하지 않아. 십자가 복음을 배우기 때문에 나는 이제 멸시 받을 이유가 없어.

이제 나는 사람들로부터 강한 자로, 지혜 있는 자로, 무엇인가 가진 자로 살아가고 있어. 그러니 어느 누구도 날 무시할 수 없어가 됩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땅에 집어넣으신 이유가 강한 자, 부자, 능력자로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죄를 마음껏 뽐내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크신가를 증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고 주 안에서 자랑이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날마다 자신이 죄 속에 살아가는 노래를 불러 주어야 제대로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들은 자신이 죄 속에 살아가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나는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니 이런 자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강함, 능력, 있음, 문벌 좋음이 되겠지요. 그러니 오늘날 교회에서는 헌금 많이 한 사람, 신앙생활 오래 한 사람, 기도 길게 하는 사람, 학벌 좋은 사람,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다 우상숭배임을 인정하는 자는 정말 주 안에서 자랑할 거리가 나오겠지요. 이런 자들이 육체를 부인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30절을 보세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하지요.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소유로 제대로 드러나려면 우린 제대로 육체를 따라 살아 가 줘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성도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을 내 소유로 만들게 되면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나로 말미암고 주께로 내가 돌려 드리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제발 우리도 노래를 부릅시다. 이스라엘자손이 불렀던 그 노래를.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다면 우린 십자가 피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노래를 불러야 하겠지요. 그 노래 제목은 항상 십자가의 원수로 산다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나를 위해 합니다라는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상황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어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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