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9

푸른 섬 2014. 10. 5. 16:04

우리의 영광

고린도전서2:6-9

지혜(sofia)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똑 같은 지혜(sofia)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온전한(teleio) 자들이 말하는 지혜(sofia)와 이 세상의 지혜(sofia)를 대조합니다.

여기에서 온전한 이라는 뜻은 완벽하다는 뜻입니다. 완성을 위해 어떤 것이 필요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완성된 자들의 지혜와 이 세상의 지혜를 대조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곧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와 동일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자들의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한 지혜입니다. 너무나 부정적이지요. 이 세대 통치자들이라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 당시 통치자들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대라는 것은 어둠의 세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을 원한 그 세대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 세대입니다. 즉 죽으리라는 말씀이 항상 유효한 세대를 말합니다. 죽음이라는 종착점을 갖고 있는 모든 세대입니다.

 

로마서 5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4절에서는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

 

모세까지만 사망이 왕노릇 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사망이 왕노릇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자들은 사망이 해당사항 없습니까? 죽습니다. 첫째 사망은 누구나 다 당해야 하는 일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히브리서 927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대 속엔 누구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완전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들의 지혜와 이 세상의 지혜의 구분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반박할 겁니다.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고 보는 것이 이 세상 지혜자들, 통치자들의 시각입니다.

 

왜 그런지 본문을 계속 봅시다. 이 세상 지혜의 특징은 통치자들이 가진 지혜입니다. 통치자들이 가진 지혜가 무엇이냐라고 우리들은 묻고 싶지요. 그러면 헤롯이나, 본디로 빌라도나, 지금 대통령의 지혜를 연구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혜를 갖고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지요.

 

선악과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따먹었지요. 이 지혜를 갖고 아담은 독자적 행동에 나섭니다. 그 독자적 행동이란 항상 하나님과 대적하는 독자적 행동이요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히는 행동입니다. 이사야 1319절에 보면 열국의 영광이요 사람의 자랑하는 바벨론이 나옵니다.

 

모든 나라들이 무엇을 보고 영광스럽다고 생각했겠습니까? 무엇을 보고 사람의 자랑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강한 힘과 잘사는 것을 두고 그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1413,14절을 보면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위에 앉으리라 자강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 지리라 하는도다

 

헤롯이 이런 마음을 품었을까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이런 마음이 있을까요? 예수님과 대화중에 어디에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세대 통치자들은 완전한 자들의 지혜를 모릅니다. 그래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자들의 지혜를 모르는 자들은 곧 모두가 다 한 통속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대 통치자들의 지혜, 즉 이 세대의 지혜의 최종 목적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나는 내 자식만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다른 욕심 없습니다. 나는 우리 가정만 화평하기를 바랍니다라는 것도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통치자들의 지혜와 동일합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까? 자기 자리 유지잖아요. 자리가 유지 되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가정의 평화도 다 깨어 져요. 출세 못하면 아내의 구박을 어떻게 견딥니까?

 

그러나 총독자리에 있으니, 그나마 돈이라도 벌어오니 자식들이 아버지라 인정해 주고, 남편이라 인정해 주지 않습니까? 어느 누가 엘리아의 자리에 있으려고 하겠습니까? 옆에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어요. 아무도 없고 함께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없어요. 눈에 안 보여요.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요. 내가 만일 엘리야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 엘리야가 여기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다고 하셨는데 우린 어떻게 합니까? 돈 없다고 발악하고, 아프다고 발악하고, 일이 잘 안 풀린다고 발악하고, 차 막힌다고 발악하고, 죽고 싶을 때가 어디 한 두 번입니까?

 

이 세대 통치자들의 지혜란 자기 원하는 대로 일이 되어 지고 자기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사는 사람치고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이건 제 말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이 세상의 지혜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통치자 되고 싶지 않는 사람 있어요.

 

여기 바닷가를 가보면 아주 좋은 집들이 많지요. 수백평 되는 그런 집에 살고 싶지 않나요? 돈이 없어서, 권력이 없어서 그렇게 못사는 겁니다. 청빈하게 산다고요? 그것도 자기 이름,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어느 누가 십자가를 자랑합니까?

 

왜 여기에 십자가를 집어 넣습니까라고 할겁니다. 주님의 비교는 항상 십자가와 비교합니다. 청빈하게 살았다, 부자되어 살았다, 깨끗하게 살았다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이 세상 지혜를 위해 산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지혜는 없어질 지혜입니다. 밤마다 누구면 그 지혜 사라집니다. 살 동안 계속해서 네가 가진 지혜는 사라지는 지혜라는 것을 알려 주시지만 포기하지 않지요.

 

9절을 봅시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주님이 준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즉 예수님을 눈으로 봐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종교적 체험을 경험해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너갑니다.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을 바로의 군대가 봤어요. 우리 같으면 아이 무서워라 하고 물러날 건데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홍해로 들어갑니다. 그전에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아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어요.

 

예수님께서 나병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제사장에게 입증하라고 하셨습니다(5:12-16). 제사장들이 이것을 보고 믿었나요? 안 믿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또한 귀로 듣지도 못해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디 한 두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마나 많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나요? 믿음이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음성 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말씀을 몰라요. 그러니 맨날 자기 체험을 자랑하지요. 그런 사람의 특징은 이런 말씀을 안 믿어요.

 

성경공부 아무리 해 보세요. 그것으로 믿음이 생길 것 같으면 주님이 성경공부 단계별을 준비해서 우리에게 주셨을 거예요. 물론 그렇게 주셔 놓고도 그렇게 공부해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겠지요.

성경을 눈으로 아무리 많이 읽고, 설교를 수도 없이 들어도 온전한 자들의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공부하면 믿음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이런 태도가 바로 이 세상 통치자들이 갖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생겼다고 하는 믿음은 누구만을 자랑합니까? 자기 자신만을 자랑해요.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며, 하나님도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또 하나는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수도 없잖아요. 눈으로 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은 구체적인 것들이지만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들이잖아요. 그러니 그 방법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기도를 하루에 5시간씩 한다든지, 아니면 명상을 10시간씩 한다든지, 아니면 성경구절을 달달 외운다든지, 아니면 남을 열심히 도와준다든지, 가난한 자를 도와준다든지, 헌금을 왕창한다든지, 십일조를 꼬박꼬박 한다든지, 성경을 하루에 열장씩 읽는다든지, 제자 훈련 한다든지, 새벽기도 빠지지 않는다든지, 주일 예배 삼십분 전에 간다든지, 헌금 할 때에는 새돈으로 한다든지, 월급 받으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바친다든지, 산속으로 들어간다든지, 예배당을 크게 짓는다든지 셀 수 없이 많지요.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행위로 하나님의 지혜로 접근 못해요. 아무상관이 없어요. 참 이게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성이 있기를 원합니다. 또 그래야만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는 어떤 것으로도 접근 불가라고 한다면 우린 어떤 결론을 내릴까요?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놀자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어느 누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아요. 밥은 먹지요. 돈은 벌지요. 자식 키우지요. 얼마나 하는 일이 많아요. 그런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논데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의 지혜는 은밀한 가운데 있는 지혜입니다. 감추어졌던 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린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결국 우리의 영광을 위한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졌던,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가 아닙니까라고 하겠지요.

 

오늘 설교 제목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가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목적으로 지혜를 행세합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기 위한 지혜의 발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감추어졌던 지혜라고 합니다. 그것도 만세전에 미리 정해 놓으신 지혜입니다.

 

듣는 우리 기분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좋지요. 그런데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것은 분명한데 여기에서 나오는 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간단하지요. 이 세상의 지혜를 아는 자들,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를 아는 자들이 우리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는 자신도 이 세상의 지혜 속에 포함됨을 아는 자들이지요. 즉 자신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라고 인정하는 자가 우리 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자가 어떻게 영광을 받습니까?

 

우린 곧장 우리를 이해할 때 나를 자꾸 그 속에 집어넣고 싶어 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 이름을 우리 속에 집어넣고 싶어 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일 내 이름을 그 속에 집어넣게 되면 그것은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와 동일한 지혜가 되어 버립니다.

 

창세기 11장에 바벨탑을 쌓을 때 그들이 내건 슬로건이 있지요.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여기에서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의 이름과 나의 이름이 함께 모여진 일인칭 복수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라는 것은 나의 이름의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에서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 속에는 나의 이름이 부정된 일인칭 복수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아니요 나는 아니요, 나는 아니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이름만을 앞장세우는 우리가 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나오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에서 우리라는 단어 속에는 내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 죄인을 예수의 이름이 구원해 주셨습니다라는 것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말은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라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은 그냥 예수님 혼자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반드시 용서 받은 자들을 품고 있는 이름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말씀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위한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표현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린 또 이런 반문하지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미리 써 주었으면 우리가 이해하기 얼마나 쉽습니까라고 할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써 놓았잖아요. 그런데 우리 눈에 그렇게 안보이니 문제가 되지요. 왜냐하면 우린 지혜라는 단어를 보아도 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지혜로 밖에 안 보입니다. 이 세상 지혜와 다른 지혜라고 말해도 그 지혜는 역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한 지혜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 하시는 겁니다.

 

9절 앞부분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이 표현이 곧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표현의 다른 표현 방식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우린 나밖에 사랑하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었어요. 어떤 식으로 만들었나요? 우린 날마다 눈으로, 귀로, 내 마음의 생각대로 주님의 믿으려고 하지요.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로 우리에게 다가 와 버립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시면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십니다. 이렇게 하심은 오직 예수의 이름만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것은 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가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우린 김이 푹 빠져 버리지요. 김이 푹 세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말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베푸신 지혜가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의 자리는 항상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 있고, 늘 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지혜를 발산하는 자임이 십자가 앞에서 늘 발각되셔서 죄인중의 괴수임이 드러날 때 그것이 온전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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