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10

푸른 섬 2014. 10. 12. 16:34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

고린도전서2:10-13

야경꾼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사담이라는 자가 주술로 사람들을 자기 입맛에 맞게 움직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움직임에 이용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오히려 이용당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자신이 누구에게 이용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회사가 나를 이용해 돈을 벌지만 결국 그 돈이 나에게 돌아오지요. 회사가 직원을 이용합니까 아니면 직원이 회사를 이용합니까? 서로 이용해 먹지요. 다만 누가 더 많이 이용 해 먹느냐에 따라 난 이용만 당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사장이나 직원 모두가 이용당했다면 어떻습니까?

 

셰익스피어의 사대비극중 리어왕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리어왕이 첫째 딸, 둘째 딸의 거짓된 사랑한다는 말에 속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딸의 진실한 말에는 분노하지요. 그런데 결국 리어왕의 판단 때문에 일가족 모두가 자살하고 죽이고 죽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책을 읽으면서 나는 리어왕처럼 되지 않아야 되겠다고 하겠지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을 가진 것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그런 리어왕처럼 되고 싶다는 사람 있습니까? 없을 겁니다.

 

그래서 리어왕과 같은 사람이 있었지요. 아담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 속에 살아가는 것을 감사한 것이 아니라 달콤한 마귀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이건 그냥 리어왕처럼 그 가족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란 사람은 모조리 다 죽은 상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에 비하면 셰익스피어의 사대 비극은 비극에도 들어가지 않아요. 왜냐하면 빠져 나갈 수 있잖아요. 다른 왕, 다른 가족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간은 리어왕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 막내딸 코딜리어의 진심을 알아 차려 그에게 왕국을 물려주었다면 행복하게 잘 살았다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겁니다.

 

고등학생들에게 말한다고 하잖아요 여러분이 지금 어떻게 공부 하느냐에 따라 신랑감이 바뀌고 신붓감이 바뀐다고 하잖아요. 이 땅에서의 비극은 얼마든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신랑감 만났다고 비극이 아닙니까? 부자 남편, 예쁜 아내 만났다고 비극이 아닙니까? 우린 자꾸 우리 자신을 감추려고 합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제거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성공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비극이 아니야, 나는 행복해. 나는 죽음과 상관없어. 이렇게 생각하며, 돈을 벌고, 자식 키우고, 공부하고, 놀고, 텔레비전보고, 영화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모든 짓들이 누군가에 의해 이용당한 것이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나옵니다. 성경은 인간이 독단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합니다.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한쪽은 세상의 영,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답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린 곧장 나는 어느 편에 속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빼시고 말씀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이야 예수님 대단하시다. 마귀는 나빠라고 할 겁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어느 자리를 차지하는고 하면 내가 마귀의 말을 들을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을 들을지 저울질을 합니다. 즉 자신은 얼마든지 마귀 쪽에 서든지 아니면 예수님 쪽에 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럴 능력 우리에겐 없습니다.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면 마귀의 시험을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만들 수 있으면 가능하면 더 많이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어느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삽니까? 특히 가장 밥을 먹고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톨스토이가 쓴 동화 중에 바보 이반이라는 동화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악마가 머리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법을 알려 준다고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정말 머리로 돈을 벌수 있는지 듣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먹을 게 안 생겨요. 계속해서 말만 할 뿐이에요. 그러자 사람들이 다 돌아가 버립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할 때 바울도 죽었고, 스데반도 죽었어요. 사람들 눈에 바울이 산자로 보일까요? 스데반이 산자로 보일까요? 분명히 말씀으로 산다고 했으면 살아야 하는데 죽었잖아요. 사람이 왜 죽어요. 못 먹어서 죽잖아요. 죽으니 못 먹고. 산다고 했으면 살아야지 왜 죽습니까? 예수님께서 사십일 밤낮 금식하셨으니 주리셨다고 합니다. 말씀으로 산다면 안 주려야 하잖아요.

 

마귀의 말을 듣고 싶잖아요.

 

그래서 마귀가 정말 말씀대로 되는지 한번 해 보라고 하지요.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예수 네가 말한 대로 천사들이 너희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는지 한번 보자라고 마귀가 말하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말장난도 아니고.

 

말씀대로 해 달라고 하고 싶잖아요. 그런 상황을 못 만났습니까? 만나게 됩니다.

 

세 번째는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거 싫어하는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당신 가진 돈, 집 나에게 주세요 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 미쳤어?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천하만국을 가지지 못해서 안달이잖아요. 사람들로부터 영광 받고 싶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우습게 여긴다고 한다면 기분 좋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면 즐겁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칭찬해 주기를 바라잖아요.

 

우린 딱 마귀편입니다. 마귀가 주고자 하는 바를 우리들이 소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르치는 바와 지혜로 하나님을 알겠다는 것은 자기가 그만큼 대단한 사람, 영광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고 싶은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의 본성상 알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린 질문합니다. 알아서 뭐하게? 라고 묻는다면 신이 되고 싶다는 겁니다. 신이 가진 그 지혜를 나도 갖고 신처럼 행세하고 싶다는 거지요. 즉 나도 나의 지혜로, 나의 행위로, 나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바로 세상의 영을 받은 자들이 취하는 모습입니다. 이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는 교육입니다.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물론 뒤쪽에는 성령의 가르치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지난 주 말씀드렸지요. 지혜도 같은 지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가르치면 영생도 얻을 수 있고, 천국도 얼마든지 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 왜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그 근본적 원인이 세상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마귀에게 조종 받고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사를 열납 받으셨고 할 때 자기 자신을 통제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직접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오히려 점화를 해 버립니다. 아벨을 죽입니다.

 

민수기21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위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이 마음이 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도 가르셨는데 에돔은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잖아요. 그들 마음을 돌이키게 해서 길을 우회하지 않고 곧장 지나가도록 길을 내어 주고,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무상제공할수 있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고생시켜요.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로 돌아가게 합니다. 완전 개고생 시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실 거면 개고생 시키지 마시고 믿는 순간 곧장 죽이시든지, 아니면 예수님 옆에 달린 구원받은 강도처럼 극적으로 나를 부르시든지. 왜 이렇게 힘들게 돈 벌어야 하고, 자식 키워야 하고, 사람들 눈치보고 살게 하느냐 하지 않습니까?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고, 음식은 너무 하찮은 음식입니다. 기분 좋겠습니까? 명색이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데. 그러자 불뱀을 보내 물게 해서 많은 사람을 보내 죽입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입니까? 불평한다고 불뱀까지 보내 죽일 필요까지 있습니까?

 

죽여야 되지요. 그래야만 그들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누구의 소속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소속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불과 구름기둥이 힘든 길로 인도하니 자신들이 세상의 영, 즉 애굽적인 사고방식, 바로의 사고와 동일함이 들통 나게 됩니다. 그래서 불뱀을 보내 죽입니다. 죽이셔야 자기 백성임이 증거됩니다. 그런 자들을 그냥 살려두면 애굽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그들을 살리는 것은 평탄한 길, 좋은 음식, 좋은 옷이 아니라 장대위에 매달린 불 뱀입니다. 즉 지금도 불뱀에 물려 죽지 않는 너희들도 장대위에 매달린 분 때문에 살아 있음을 알려 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죽이셨습니다.

 

애굽의 장자가 죽은 것과 이들의 죽음은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애굽의 장자들은 심판의 차원에서 죽이셨지만 이들의 죽음은 긍휼이 그들 속에 베풀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죽음입니다.

 

고린도전서1130-3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0-32).”

약하게 하는 것이 병들게 하는 것이, 죽이시는 것이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는 방식임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3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바로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세상은 어둠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 속에 발을 딛고 사는 자들은 그들 속에서 어떠한 수고와 노력을 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세상 속에서 인간들이 하는 짓은 불평불만 외에 없다는 겁니다. 감사가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도 불만 속에 들어가 있어요. 제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면 기분나빠하는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시잖아요. 그러면 광야에서 뱀에 물린 자들 중 놋 뱀을 본 자들만 살았지요. 주님되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자라는 겁니까? 나는 불평 불만하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난 뱀에 안 물렸습니다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는 자들이지요.

 

성경해석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해 버립니다. 분명 불뱀에 물리지 않는 자들이 있잖아요. 그들조차도 불뱀에 물린 자로 집어넣어 버립니다. 만일 불뱀에 물리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은 절대로 놋뱀을 쳐다 볼 일이 없을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 자신이 얼마든지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이들에겐 어린양의 피가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짐승에게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자신들의 상식을 내세웁니다.

 

마가복음320-30절을 봅시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 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3:20-30).”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왔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미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친족들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지켜 보와 왔던 사람들이겠지요.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미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은 죄인과 세리들입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거든요. 말 새끼는 말이잖아요. 사람의 자식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 맞잖아요.

 

아무리 살펴보고 연구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친족들이 볼 때 미친 사람으로 밖에 안 보이지요.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미친 사람이지요.

 

또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바알세불(귀신의 우두머리 사탄)이 지폈다 하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판정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연구가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구약 성경을 근거해 볼 때 예수님은 귀신의 왕이 덮쳐 그의 졸개짓을 하는 것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잖아요.

 

우리야 예수님 편에 서서 이 사람들의 판단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는 쉽지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지금 예수님의 친족들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은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인간들은 자기보다 강한 자에 의해 종노릇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강한자보다 더 강한자입니다. 그래서 그 강한 자를 결박한 후에 강탈하시는 분임을 말씀합니다. 강제로 뺏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하니 어감이 거슬립니까?

 

예수님은 전쟁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전쟁으로 안봅니다. 좋은 일 하러 오신 분으로 봐요. 그래서 전도를 할 때에도 좋은 일 하는 것처럼 비치게 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탈하는 분입니다. 강한 자를 결박한 후에 강탈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강탈하는 일이신데 친족들이나 서기관들 눈에는 미친놈, 사탄의 하수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강한 자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못하지요.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편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서기관들이나 친족들이 사탄의 종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28,29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을 향해 더러운 귀신 들렸다 하는 이유 때문에 28,29절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사람의 죄에 해당됩니까 성령을 모독한 죄에 해당됩니까?

사람의 죄가 맞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행동이 되지요.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그를 덮쳤습니다. 그는 늘 사람의 죄가 나오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지만 주님의 사랑이 그를 덮고 있어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팔아먹었지요. 역시 사람의 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살해 버렸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입지 못했어요. 다르게 표현하면 성령을 모독했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그를 종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친족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범하는 죕니다. 이런 것은 얼마든지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과 한통속이 되어 버리면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합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피를 헛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십자가를 쳐다본다는 것은 자신은 강한 자에게 결박당했고, 더 강한 자가 그 강한 자를 결박하고 자신을 강탈해 주셨음을 믿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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