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12

푸른 섬 2014. 11. 2. 12:22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

고린도전서 3:1-3

열왕기상194절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합니다. 그냥 자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나름대로 할 만큼 했다는 겁니다 물론 겸손히 말하지요. 자기 자신은 조상들보다는 좋지 않는 자라고 자기를 낮춥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엘리야는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17장에서는 엘리야가 북 이스라엘 아합왕에게 자기 자신의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게 될 것이라 말했고 실제로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이 아닌 북 이스라엘 북서쪽에 위치한 베니게 시돈 땅에 속한 사르밧 과부의 집에 비가 지면에 내릴 때까지 통에서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서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집의 죽은 아들도 살렸습니다. 이 뿐만 아니지요. 바알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과 대결해서 이겼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로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웠고 또 도랑의 물도 바짝 마르게 해 버렸습니다. 이에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엘리야는 팔백오십 명의 선지자를 모두 죽였습니다.

 

또한 엘리야는 비가 다시 내리는 것을 아합왕에서 알려 준 사람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능력이 이해 앞서 출발한 아합왕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이런 경험을 했다면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하겠습니까? 더 색다른 경험을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난번과 또 다르게 일을 하실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기대할 수 있겠지요.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행한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임당한 바알선지자처럼 만들어 버리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상황판단을 하고 생명을 위해 빨리 도망칩니다. 얼마나 빨리 도망 쳤는지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까지 이르렀습니다. 브엘세바는 유다의 가장 남쪽지역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위협 때문에 도망쳐 놓고 이제 와서 광야로 나아가서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무슨 행동입니까?

 

천사가 그를 어루만져 깨워 음식을 준비해 먹이시고 사십 일 동안 가서 호렙산에 이르게 합니다. 엘리야를 끌고 호렙산으로 가신 거지요. 출애굽 해서 호렙산에서 돌판을 받고 사십년 광야 생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코스를 되돌아갑니다.

 

출애굽기19장에서 모세가 호렙산에 올랐을 때에는 우레와 번개, 빽빽한 구름, 나팔 소리, 불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겐 세미한 소리가 들립니다. 너무나 다릅니다.

 

엘리야의 기적과 기적을 보노라면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보면 엘리야는 호렙산을 목적하고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왜 그럴까요?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기대하면서 호렙산에 왔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찾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실 지를 기대하고 호렙산에 온 겁니다. 그러니 죽기를 원한다, 조상보다 좋지 못하다는 표현은 결국 엘리야가 속에 이런 기대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번개, 천둥, 하늘에서 내리는 불이 아니라 역사를 갖고 일을 해 버립니다. 다메섹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아벨므호랄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실제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를 대신하여 선지자 되게 하는 일만 엘리야가 하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붓고,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 일은 모두 엘리사가 합니다.

 

오히려 선지자를 보내 아합왕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케 하실 것도 알려 주십니다. 심지어 아람왕 벤하닷을 사로잡기 까지 합니다. 이해가 안가지요.

 

엘리야는 물론 자신이 기대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단지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왕성19:17).

 

이세벨이 이렇게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겼다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일을 하면서도 착각했지요. 나만 남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여호와의 일을 자신이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분명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사용해서 일을 하셨지요.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엘리야의 생각은 그 일이 자신의 일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대하는 심판을 기대하면서 호렙산에 온 겁니다. 그 기대를 무참히 깨어 버리시는 여호와입니다. 우리 생각에 여호와께서 좀 심하다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부렸으면 엘리야의 입장도 이해해 줄 필요가 있잖아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야의 바램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말한 언약대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또 이런 소리 할 수 있을 겁니다. 남은 철천명이 있다면 하나님 그들을 사용하세요. 저는 이제 빠질랍니다 하겠지요.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식이라면 엘리야를 탈락 시켜버립니다. 빼 버립니다. 그런 자를 사용할 이유가 없지요. 엘리야는 철저하게 자신만 남았다고 우기는 자로 드러나야 하고 그런 자가 다시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나서야만 이 일이 여호와께서 언약대로 엘리야를 사용하시는 일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엘리야는 분명 이스라엘이 주의 언약을 버렸다고 본인이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정작 본인은 알지 못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가 나옵니다.

영에 속한 자라는 것은 헬라어로 (pneumatikov") 프뉴마티코스 입니다. 즉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말이 ( savrkino" )살키노스입니다. 전전으로 육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좀 이상하다 생각되지 않습니까? 성도는 어디에 속했을까요?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육에 속한 사람입니까? 분명 성령에 속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육신에 속한 자를 대함 같이 대한다고 합니다. 3절에는 노골적으로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해 버리지요.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한다는 말은 너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성도라면 당연히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아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육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싫어 할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육에 속해 버리면 그 사람은 지옥가지요.

 

갈라디아서 6:12절을 보게 되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육체라는 단어도 역시 사륵스입니다.

 

그런데 영에 속한 사도 바울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린 이러고 싶지요. 성령에 속한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로 살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요. 문제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육에 속한 사람이 되어 지옥 갑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관심이 여기에 있지요. 물론 천국지옥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불만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은근히 사도 바울이 부러워집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성경말씀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발이 땅에서 떨어져 버리면 쉬울 텐데 우리의 발이 땅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목사들은 쉽게 이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 여러분은 육신에 속한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어린 아이에 머물면 안 됩니다. 빨리 자라 어른이 되십시오. 성령에 속한 자가 되십시오. 우리 자신의 지식과 의지를 버리세요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목사에게 한번 물어 봅시다. 도대체 육신에 속하지 않는 상태가 어떤 상태며 어른 상태가 어떤 상태입니까?

 

저들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러면 이 본문을 읽는 우리는 어린아이입니까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이 본문은 우리가 읽을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이 본문을 대할 때 어린아이 단계를 뛰어 넘어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누구든지 어린아이단계를 뛰어 넘었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고린도 전서가 필요 없을 겁니다. 아니 성경이 필요 없겠지요. 책망 받을 것이 없잖아요. 성경이 필요 없다는 말은 나 더 이상 책망 받을 것이 없다라는 말이잖아요.

 

2절에 나오는 젖과 밥을 구분하는 것은 히브리서 511절 이하에 보면 멜기세덱 이야기 하면서 단단한 음식과 어린아이를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 사도바울의 말을 듣는 고린도 교인들은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어린아이라는 말인가요?

 

그러면 앞서 우리들이 살펴본 엘리야를 한번 봅시다.

엘리야가 왜 죽여 달라고 기도합니까? 그가 호렙산으로 간 목적과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은 어떻습니까?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모세가 중보자 되었던 것을 기억했을까요? 아니면 호렙산에서 이스라엘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을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처음부터 중보자를 통해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 즉 모세가 만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겁니다. 모세보다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엘리야지요.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 하면서 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중보하지요. 그런데 엘리야는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그 역할이 다 달라서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928절 이하에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별세( e[xodo")에 대해 말씀을 나누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별세가 엑소도스입니다. 탈출, 죽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지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만드시는 탈출, 즉 출애굽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만드시는 탈출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지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동동하게 토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과거에 행했던 그 역할은 그림자의 역할로 진정 실체되신 분이 이루실 십자가를 증거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철저하게 죄인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엘리야가 선지자로 부름 받아 그런 대단한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그에게서 그런 죽여 달라는 모습이 나올지, 자신만 남았다는 소리가 나올지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어떤 목사는 엘리야의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린 엘리야처럼 절대로 절망하면 안 된다. 주님께서 남겨진 자가 있다. 주님께서 반드시 모든 일을 그분의 뜻대로 행하실 것을 믿고 신앙생활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되어 버리면 호렙산에서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남은 자가 칠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절대로 알지 못하겠지요. 오직 불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만 알 뿐이겠지요. 뿐만 아니라 엘리야에겐 십자가가 필요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 직접 해 주시는 할례가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알아서 할례를 행하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린 그런 것은 이미 다 아니 절망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하겠지요. 오늘 본문으로 들어와 보면 분쟁하면 안 된다. 누구에게 속했다고 하지 말라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십자가지신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속했다는 식의 말은 끄집어내면 안 된다. 파벌 만들면 안 된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누구에게 말씀을 듣게 되면 어떤 식으로 말합니까?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까?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정 목사가, 이목사가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쉽습니까?

 

분명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심는 이, 물주는 이를 주목하는 것이 우리가 아닙니까?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 즉 사륵스는 어떻게 인식을 합니까? 정 목사가, 김 목사가, 이 목사가 가르쳐 주었다고 인식을 하지요. 그 가르침이 주님이 가르쳤다고 믿지를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13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분명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고 계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가 분명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욕망이지요. 늘 이렇게 느끼고 싶어 합니다. 늘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늘 이런 상태를 유지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가 필요 있을까요?

 

죄를 더 이상 짓지 않는 완벽한 상태인데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이 말씀에서는 십자가가 필요 없으니 말씀을 찢어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책망 받을 이유가 없잖아요.

주님께서는 말씀대로 친히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받게 하십니다. 말씀대로 심는 이나 물주는 이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알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이 자라게 하심을 믿게 하시지요. 이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언약대로 일을 진행하실 때 엘리야는 십자가를 전하는 자로 드러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지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심는 이나 물주는 이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알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자라게 하심을 믿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쪽에서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지만 몸이 있는 자는 계속해서 육적인 자로 드러나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로 받다가, 사람을 중히 여기다가, 주님의 말씀으로 받게 하시고, 사람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만 높이는 자로 용암이 분출하듯 분출하다가 다시 숨어들어 갑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 이 본문을 갖고 책망하시는 겁니다. 난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정말 영에 속한 자라면 그는 오히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책망 받습니다.

 

엘리야처럼 죽여 달라고 해 보세요. 주님은 산채로 데려 가 버립니다. 주님을 절대로 내 원대로 하지 않으시고 언약대로만 일을 하십니다.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 하도록 자기 백성을 다루십니다.

그러니 내가 꿈꾸는 신앙생활을 빨리 포기 하십시오.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밀리는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가 바로 주님의 피를 듬뿍 바른 자리가 될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고린도전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전서강해 15  (0) 2014.11.24
고린도전서 강해 13  (0) 2014.11.09
고린도전서강해 11  (0) 2014.10.19
고린도전서 강해 10  (0) 2014.10.12
고린도전서강해 9  (0) 2014.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