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11

푸른 섬 2014. 10. 19. 20:10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

고린도전서214-16

이 세상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나눈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요? 우린 익숙해져 있지요.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권력자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 좋은 대학 나온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 이 세상은 항상 두부류로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쩌면 어리석은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나눈다는 것에 대해 쉽게 동의 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부분에서 만큼은 목숨 걸고 싫어합니다.

 

평소 살아가는 현장이 타인과 나를 구별하지만 이 부분에서 만큼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지 않기를 원해요. 왜 그렇습니까? 만일 어리석은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나누게 된다면 어리석은 사람 속에 내 아내, 내 남편, 사랑하는 부모, 내 자식들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영적인 사람이 되어 천국 가는데 만일 아내나, 남편, 미운아내나 죽이고 싶은 남편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식이 지옥 간다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또 한 가지 기분 나쁜 것은 네가 뭔데 사람들을 두 부류나 나누느냐 입니다. 네가 신도 아니면서, 하나님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어리석은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나누느냐는 것이지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천국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가족이든, 부모든, 아내든 남편이든 당연히 천국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실상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죽음 속에 들어 있는 자로 모두다 지옥가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죽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면서 자신과 자신에게서 퍼져 나온 양태들만큼은 천국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주님이 너는 천국이지만 네 자식은 지옥 간다고 한다면 이것보다 잔인한 하나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인간들의 어떠한 행위도 보지 않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사항이라면 이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목사 딸이기 때문에 천국 간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자들이 있지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천국 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지옥가야 마땅하다고 여긴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천국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듣는 바리새인들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만은 얼마든지 천국에 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신은 하지 못하더라도 설마 내가 지옥 가겠는가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와 영적인 자를 구분하는 일을 해 버리면 버럭 화를 냅니다.

 

먼저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을 봅시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며,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너무 심하지요.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근본적으로 알수 없다고 선언해버리는 것은 너무 심한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자에게는 성령의 일이 어리석게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어떻게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알 수도 없는데 가르친다고 알 수 있겠습니까?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더욱더 어리석게 보일 뿐이고 오히려 성령의 일을 방해하지요.

 

예레미아520-31절을 봅시다.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아니 그것을 이지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을 것을 막았느니라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한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나

 

이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마나 한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자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에게 들으라고 합니다. 이리 들을 수 없는 자들에게 들으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마태복음1313절에서 인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자는 철저하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즉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래도 알아듣는 자가 있잖아요라고 하지요. 물론 예수님께서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알아듣는 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우리들은 근방 화색이 돌면서 그래 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알아듣는 자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쏟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215절을 보면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지리적으로 애굽은 실질적으로 나일강변에 있는 애굽인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예수님께 태어나신 곳인 예루살렘을 애굽으로 규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이 아니면 모든 곳이 애굽입니다. 지리적 애굽도 애굽이요 예루살렘도 애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철저하게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1316절에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하셨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우리 같아도 기쁘겠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너희가 과연 제자들 너희일까요? 아닙니다.

 

만일 여기에서 나오는 너희들이 제자들이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십자가지지 못하게 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하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지러 가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누가 더 높은 자리 차지하는가에 관심 있으면 안 되지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면 안 되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방금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 구원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나를 위해 오신 분이라 생각해요.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오신 분이라 생각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겁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 뽑힌 받은 자들이 그러했다면 다른 사람들을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함께 생활한 자들이 예레미아 5장 말씀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어떤 인간에게도 천국의 비밀이 알려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허락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영적이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어떠한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입니까? 분별하는 사람, 판단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판단하고 분별합니까? 고린도전서 123절을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말미암아 거꾸로 판단을 받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요.

십자가 복음은 거리끼는 것, 미련한 것이라고 상대가 판단을 해 버립니다.

 

이런 판단을 받는 자가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을 받기 전에 먼저 영적인 사람들이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주님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지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로 섭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좋지요.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판단할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리석은 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지요. 그러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하면, 즉 어리석은 자와 영적인 자를 나누는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 너만 잘났나? 너만 영적인 사람이고 우린 어리석은 지옥가야 될 사람이냐가 화를 내지요.

.

지금 화를 내는 자들은, 분노를 내는 자들은 무엇을 모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심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이 주님이라면 그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리가 어리석은 자의 자리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는 겁니다.

 

분명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하지요.

 

사도행전3장에 보면 성전미문에 있는 앉은 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고쳐주는 일이 나옵니다. 제가 표현을 이렇게 했지만 사실 주님이 죄용서 해 주셨지요.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의 판단을 받았습니다. 즉 베드로와 요한의 개인적인 권능과 경건으로 않은 뱅이를 고쳤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나의 개인적 권능과 경건이 않은 뱅이를 고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죽인 생명의 주님이 부활하셔서 그 주님이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했다고 증거합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판단합니다. 자신들을 판단하는 자들을 판단해 버리지요. 회개하라는 겁니다. 이 판단으로 인해 복음을 싫어하는 자와 믿는 자가 분리됩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자들임을 인정하는 겁니까? 자신이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인정하는 거지요.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살아생전 복음을 전하시는 그대로 복음을 전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주님의 일이잖아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하니 이 말씀에 오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그 일을 그대로 다 당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전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리석은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는 것을 발악하면서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근본적으로 막혀 있어요. 자신이 주님 행세하고 싶은 겁니다.

 

자신이 판단자의 위치에 서고 싶은 겁니다. 판단자의 위치에 서고 싶으니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에게 소속되었는가를 전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영적인 사람이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주되심만을 전합니다. 그렇기에 어리석은 자와 영적인 사람을 구분 짓는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는 자가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 죄임을 늘 발각되어질 때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의가 된다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겁니다.

 

그저께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나이롱 신자라고 말입니다.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고...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국은 세리와 창기가 가는 곳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만 가는 곳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할 때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고정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헛되지 않도록 자기 백성을 늘 어리석은 자로 고정시켜 버립니다. 이런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고정시키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어리석은 자와 영적인 자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 왜 화를 낼까요? 그렇게 판단하는 것을 왜 싫어할까요? 그 이유는 자신은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꾹 믿고 있기 때문에 분노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지 의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을 의인이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겠습니까?

 

내 자식만큼은 구원받아야 된다. 내 사랑하는 아내, 부모만큼은 천국가야 된다. 그래서 밤낮 기도하잖아요. 예수님의 피로 창세전에 택한 자들만 구원하시는데 우리들은 그 결정에 분노하고, 기를 쓰고 그 결정을 번복시키려고 하지요.

그래서 모든 것이 나로 인하고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오는 코스에 주님이 조금 도와만 주시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만을 전한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합니다. 제발 어리석은 자로 드러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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