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8

푸른 섬 2014. 9. 28. 15:52

지혜의 아름다운 것과 십자가

고린도전서 2:1-5

여호수아7장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간이라는 이름이 왜 등장하는고 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여호와께 바친 물건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왜 전리품을 취하면 안 됩니까? 여러분들이 땀 흘려 일한 돈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잠 세 시간 자고 일등한 공로가 누구의 공입니까? 자기의 공로니 당연히 칭찬 받는 것도 자기 자신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리고 성을 여호와께서 무너뜨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속으로 직접 들어가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을 진멸한 자가 누굽니까? 아간입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여리고성을 홀로 다 무너뜨리시고, 홀로 적들을 진멸하셨다면 아간이 전리품 취한 것은 문제가 있겠다고 생각되지요. 그런데 지금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한 자가 아간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그가 물건 몇 개 취했다고 문제 될 것이 있을까요?

 

여호수아 618절 이하를 보면 오직 너희가 바치는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워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분이 여호와입니다. 그러면 전쟁을 승리케 하신 분은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시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바칠 물건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왜냐하면 이미 다 여호와의 것이잖아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 꼭 사람을 사용합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전쟁에서 승리하셨다는 증거물로 사람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꼭 전쟁에 이스라엘을 참여 시킵니다. 참여 시키는 이유는 자신들이 싸움을 잘해서 승리한 것이 아님을 증거하라고 전쟁에 참여시키는 겁니다. 누가 전쟁하셨고 승리하셨는지를 증거하라고 이스라엘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겁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여호와께 바친 것이라고 한다면 별로 욕심이 안 생겨요. 문제는 전쟁에 참여 시킵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직접 체험하게 합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전쟁의 전리품을 여호와께 자신들이 바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바치라고 하셨으니 바쳐야 하겠지요.

 

이렇게 보면 전쟁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았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 그리고 함성 지르고, 여리고성으로 진격해서 적들을 진멸했고, 전리품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지 않았어요. 할 만큼 다 했어요.

 

그러면 전리품 하나쯤은 가져도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돈을 누가 벌어요. 자식을 누가 키웁니까? 내가 뼈 빠지게 일해서 돈을 벌고, 내가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 밥해 먹이고 학교 보내잖아요. 그 일을 누가 대신해 줍니까? 아무도 안 해 주잖아요. 내가 출근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돈을 하늘에서 부어 줍니까? 절대 그럴 일 없잖아요. 원인 없는 결과는 없잖아요.

 

이사야 651절을 봅시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이게 말이 됩니까? 신을 내가 찾지 않았는데 신이 먼저 찾아 오셨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무슨 말이고 하면 내가 전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생기는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사야 651절에서는 네가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6,27).”

공중의 새는 농사짓지 않습니다.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냉장고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예수님은 곧장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새들이 얼마나 열심히 먹이를 찾아 다닙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많이 잡아먹는다 는 격언이 있지요. 새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다닙니까?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일언반구도 하시지 않고 아버지께서 기르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동의 안 됩니다. 동의 안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정상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키 이야기를 하셨어요. 내 키가 크고 싶다고 커집니까? 요즘은 키를 키우는 비법이 있답니다. 키 크는 약도 있고, 키 크는 방법도 있고, 키 크는 수술도 한답니다. 그래서 병신 된 사람도 생기고요.

 

내가 먹어 줘야 키가 커잖아요. 내가 안 먹으면 죽잖아요. 내가 원한 만큼 키를 키울 수는 없어도 어찌 되었던 키가 크려면 내 노력이 동반되어야 되잖아요.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없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걱정한다고 키 좀 더 키울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과학을 너무 잘 배워서 예수님 말씀은 오늘날에 좀 안 맞는 것 같지 않아요?

 

나니아 연대기라는 판타지 동화가 있는데, 영화로도 나왔지요. 그 책에 보면 말하는 동물들이 나와요. 요즘 얘들이야 동물들이 말한다고 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화책이나 만화영화에 동물들이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기차도 말하고, 자동차도 말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동물이 말할 수 있을까요?

흉내내는 코끼리나 구관조는 있지요. 민수기 2228절에 보면 당나귀가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만화책 보듯이, 나니아 연대기 읽듯이 읽어요. 그냥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당나귀가 말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 삶과 관련이 별로 없어요. 오늘날 당나귀 타고 다니는 사람 없잖아요. 혹시 성경에서 자동차가 말했다고 하면 모를까.

 

마태복음6장에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키나 입고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의 손과 발, 두뇌가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이 과학을 모르는 무식한 말씀이라 무시해 버립니다. 누가 무시합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무시해 버립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나의 힘과 나의 수고 외에 무엇이 있습니까? 물론 신이 쪼금 도와 주는 부분도 있겠지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님이 새를 기르신다고 믿으십니까? 아니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이 새를 기르신다고 보입니까? 그렇데 보이지 않잖아요. 키를 누가 키웁니까? 얘들에게 더 잘 먹이고, 키 크는 보약도 지어 먹여야 크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키가 크요.

 

들풀도 하나님이 입혀 주신데요. 들풀이 자연적으로 씨에서 자라 잎과 줄기가 나와 꽃도 피고 열매를 맺지 누가 그것 키웁니까? 우리 집 화분에 보면 나팔 꽃이 펴 있어요. 제가 열심히 물을 주기 때문에 씨가 자라 꽃을 피웠어요. 때 맞춰 물 안주면 그냥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누가 죽이고 살립니까? 화초를 가꾸는 내가 죽이고 살리지요.

 

그걸 보고 주님이 기르시고 주님이 죽이신다고 할 사람 있을까요?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이 키우시고 주님이 죽이십니다. 참새 두 마리도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주님이 허락해야 팔립니다. 주님이 허락해야 그게 꼬치가 됩니다. 이 땅에 펼쳐진 모든 것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일을 하시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좀 이성적이라 해서 인간들은 이것을 안 믿어요.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니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을 누가 믿겠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식으로 전해야 합니까? 상대가 수긍하도록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신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그렇게 했다는 말일까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오늘 본문과 상충되잖아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말이란 뛰어난 언변이나 수사학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변이나 수사학은 무조건 잘못되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말의 핵심은 자기 자랑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는 말은 자신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자랑할 분은 주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말을 했을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십자가를 더욱더 돋보이게 하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말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는 겁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은 항상 무엇을 보게 됩니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말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전도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성경을 잘 가르치면 아멘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복음 전도가 이런 식이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떤 겁니다.

 

자기 자랑이 되면 안 되잖아요. 4절에 나오지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나오지요.

 

우리를 죄 아래 가두어 놓고 우리 쪽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도 지옥갈 수 없고, 오직 주님이 천국과 지옥을 자신의 피를 근거로 갈라내신다는 말씀을 아멘 시키는 분이 주님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우리의 말과 우리의 전도함의 설득력을 부정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데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나올까요?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다면 도대체 어떻게 믿음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믿음이 생긴다. 이것도 그래요. 하나님이 주시지만 내가 믿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믿지 않으면 어떻게 믿음이 생겨요?

 

주님이 믿음을 만들어요.

 

문제는 어찌되었던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잖아요. 사도바울이 전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겨요.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하지 않았다고 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지금도 고린도 전서를 읽어 보면 말이잖아요. 우리가 볼 때에는 분명 논리가 있잖아요. 이렇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해 놓고 하는 말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이해가 안 가지요. 그래서 제가 앞서 아간 이야기를 말씀드린 겁니다. 전쟁은 누가 하십니까? 주님이 하시지요. 그런데 그 전쟁에 누구를 개입시킵니까? 이스라엘을 개입시킵니다. 목숨 걸고 싸움을 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 몽땅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누구의 일로 봅니까? 주님의 일로 봅니다.

 

주님의 일로 안 보겠다는 자가 아간입니다. 그러니 전리품을 취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가 봐도 약하고 두려워하며 떨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누가 전했다고 생각합니까? 주님이 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해도 복음은 듣는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만일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믿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분면 전도하는 것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했을 겁니다.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무엇일까요?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예수 믿으면 자식이 잘 됩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이 번창합니다. 이런 겁니다. 또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자랑 거리가 많이 생깁니다. 이 땅에서는 축복을, 죽어서는 천국 갑니다.

 

아니면 여러분들이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아니면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시면 구원받고 천국 갑니다.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말을 해야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믿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전도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목적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만 있는 것을 보여주는 전도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방식은 반드시 사람의 지혜를 부정하는 것을 근거로 합니다.

 

사람의 지혜가 인정되는 구원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전도는 사람의 설득력 있는 지혜가 부정되는 전도입니다. 사람이 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주님의 전도입니다.

 

아간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언약은 주님 홀로 친히 희생하셔서 이루시는 것임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언약을 이룸에 있어 어떤 인간의 수고도 끼어들지 못합니다. 만약 끼어드는 자가 있다면 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린 늘 돈 벌고, 입고, 먹고, 자식 키우는 것이 나의 힘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자동입니다. 오늘 어떻게 일을 해서 돈을 벌까? 어떻게 자식을 키울까? 칩에 내장되어 있어요. 주님이 먹이고 일하게 하시고, 돈 벌게 하시고, 모든 것이 주님이 하심을 믿지 않아요.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늘 위배하면서 사는 겁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짜증내고, 불안해하고, 분노합니다.

 

새를 만나면서도 기르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깨닫지 못해요. 들풀은 항상 눈에 띄잖아요. 늘 눈에 보이는 들풀을 보면서도, 나무를 보면서도 감사하지 못해요. 모든 것이 자기 손안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우린 늘 전도하게 하시는 주님에 의해 전도하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전도하게 하십니까? 내 행위, 내 말, 나의 노력에 의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주님께서 베푸시는 그 혜택으로 일어나고, 밥 먹고, 돈 벌고, 자식 키우는 자임을 인정하면서 전도하게 하시지요.

 

믿음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에 있음을 믿고 살아가야 하지요. 그래서 우린 항상 십자가만 자랑하는 겁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십자가 자랑은 십자가 자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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