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24

푸른 섬 2015. 1. 26. 21:04

사랑하는 자녀

고린도전서414-17

자녀들의 가장 큰 불만은 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어요. 우리를 여기 있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세요. 처음부터 세상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세상이 만들어진 목적이 정해진 이상 이 세상은 그 목적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더 기분 나쁜 것은 어둠과 빛으로 갈라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창세전부터 말입니다.

 

또 더 기분 나쁜 것은 어둠과 빛은 우리 인간이 전혀 관여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어둠이 되고 싶다고 해서 어둠이 되고, 내가 빛이 되고 싶다고 해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한 10대 아이가 is에 가입하겠다고 터키를 통해 시리아로 들어갔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도 마귀편이 되고 싶어 아니면 난 예수님 편이 될 거야 해서 예수님편이 되고 마귀편이 되어 질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 주변에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갈대아 우르에 사는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일까요?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만 쏙 뽑아 불러내어 이스라엘을 만드셨어요. 그리고 그 민족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만드셨어요. 아브라함이 자신을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더 중요한 사실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아브라함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만 선택하셨어요. 무슨 이런 하나님이 다 있습니까?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면 모두 지옥 간답니다. 이런 일방적 조치에 대해서 기분 좋은 사람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일방적 조치에 의해 끌려 다닌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지요.

 

아브라함이 대표적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이 아브라함을 주도적으로 인도하셨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이끌어 다녀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은 지옥 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에 대해 반항을 합니다. 그 반항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요?

 

우상 숭배한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반항의 모습의 가장 극점은 말씀 지키기입니다. 그러면 말씀 지키기가 어떻게 나왔는가?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 말씀 지키기 외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길이 없음을 확인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순종할 때 멸망당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말씀에 순종할 때 축복받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 빠지지 않으면 여러분의 마음이 편합니까 편하지 않습니까? 편해요. 그런데 만일 이런 종교적인 활동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불안하지요.


이게 다르지 않아요. 종교적인 생활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사람들이 왜 종교적인 교회나 성당을 좋아할까요?

왜 절에 갈까요? 왜 무당을 찾겠습니까? 나만의 특별한 행동이 나 자신에게 평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축복이다라고 하면 안 믿어져요. 밥 먹거나 운전하거니 직장생활하거나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반드시 성경책을 펼치고, 기도 하고, 봉사하고, 헌금해야 주님의 축복 속에 내가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에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무슨 종교적인 행위가 있습니까?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것이 종교적인 행위입니까? 아니지요. 아브라함이 기도하면서 여보 나 당신 때문에 죽을 수 있으니 우리 함께 기도해보고 여호와께서 당신을 누이라고 속이라고 하면 속이겠다고 해서 누이로 속인 것이 아닙니다.

 

우린 신앙생활에 대해 어떤 기대하는 바가 있어요. 나름대로 종교적인 것을 갖추는 것을 신앙생활,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지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예수님을 믿는 가라고 하면 뭔가 종교적인 것이 가미 되어질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십자가의 피만 강조하는 복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활동을 인정해 주어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모이지요.

 

종교적이니 활동, 즉 나만의 특정 행동이 신앙생활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해주어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뭔가 종교적인 형식을 갖는 것을 깨어 버리면 짜증냅니다.

 

종교적인 형식을 깨면서 잔소리만 하는 복음은 싫습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고 모였다면 그들의 모임이 만들어 내는 것은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야곱이 이런 마음이었지요. 이미 하나님은 뱃속에서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결정하셨으니 당연히 그 결정을 자신에게 실현시키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자권을 뺏어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냅니다. 아버지의 축복과 재산의 부유해짐을 통해 자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라 확신했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을 자신이 이해하고 긍정하는 것으로 바꾸었지요.

 

그런데 낯선 분과의 싸움을 통해 그의 축복관은 바뀝니다. 그 축복이란 야곱을 담은 이스라엘로 사는 것이 축복이 됩니다. 이전 같았으면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여전히 야곱적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되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야곱적 사고방식과 싸우는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 싸움 속에서 야곱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요셉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죽음 경험이 바로 축복입니다. 물론 그는 괴롭지요. 슬프지요.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것의 반복 속에 놓여 있음이 축복임을 그의 긴 생애를 통해 보여줍니다. 물론 구약이기 때문에 그 결과도 보여줍니다. 요셉이 죽음에서 살아오는 기쁨을 맛보지요.

 

그러나 그는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손을 어긋맞게 하여 축복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은 항상 우리의 기대와 예상을 빗나가게 하셔서 복을 내리시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즉 광야 이스라엘을 보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놓여 있는 자들임을 증거한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죽이시는 방식으로 그들을 광야생활로 인도하셨습니다.

 

외부적 적인 바로의 군대를 몰살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멸망은 축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즉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을 민족전체를 가지고 보여주는 겁니다.

 

얍복 강가에서의 죽음을 광야에서 죽음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죽음이 그들을 살립니다. 날마다 희생제물이 드려짐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되는 삶을 사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스라엘이 사는 것이 희생 제물로 인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문제는 희생 제물로 인하여 살아가는 축복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이스라엘이 했습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것이 이런 삶입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피로 살아가는 축복받은 인생인데 축복받은 인생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축복받은 인생에 초점을 맞추게 되니 결국 그 인생이 만들어 내는 모양, 즉 종교적인 모양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주님의 피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집니다. 일년에 한번 고난 주간에 떠올리면 되지요.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의 피를 매주 설교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겁니다. 먹고 살길을 막는 길입니다.

 

사도바울이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의 말이 듣는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부끄럽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말을 듣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곧 책망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곧 사랑받는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십자가의 피공로가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아비에 비유합니다.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하지요. 바울이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낳았다면 낳은 자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녀들이야 혼내고 달래고 어떻게 할 수 있지만 어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싫은 소리 하면 말씀을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뭔가 자신들만의 신앙영역을 부정해 버린다면 기분 나빠서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물론 믿긴 믿겠지요. 그러나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떠난 예수를 믿겠지요.

 

여러분이 만일 사도바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했다면 바울 편에 남겨두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어 버립니다. 즉 주님의 피가 나를 복음 전하게 했고 너희들이 믿었다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빼 버립니다.

 

그런데 땅의 언어에 있어서는 사도바울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내가 너희를 낳았다는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피를 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결코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수고도 자신의 수고가 아닙니다. 삼층 천에 올라갔어도 자신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복음 전하고 수고했으면 교회에서 대접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영역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이나 교인들은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듭니다. 자신의 신앙경험, 목회경력들을 자신들만의 영역으로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그들만의 영역을 건드리는 십자가 복음이 있다면 발작을 일으키면서 반항을 합니다.

 

목사들을 만나면 목사들의 수고하는 것을 인정해 주고, 위로해 줄 때 비로소 그들의 얼굴에 미소를 띱니다. 교인들을 만나도 그들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를 칭찬해 줄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십자가 복음, 우리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고 하면 그들이 화를 냅니다.

왜 나에게 권하느냐 나 예수 잘 믿는 사람인데.

 

내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 지 네가 알기나 해라고 합니다.

 

그러니 주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무시당하고 멸시당합니다.

 

나만의 독단적인 영역이 있을 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만든 나만의 영역이 존재할 때 비로소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나옵니다. 나만의 영역을 부정하는 소리를 한다면 귀를 막고 돌을 던지지요.

 

계속해서 말씀이 우리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이유는 십자가 사랑의 깊이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십자가 사랑을 자기 사랑으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의 책망은 듣기 싫습니다. 성경 덮기 운동을 합니다. 성경을 열더라도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켜주는 본문만 끌어당겨 영역을 더욱 확장하고 확고히 하는 것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하고, 주님을 이용할 뿐이지요.

 

십자가 사랑이 없는 자는 땅의 것으로 자신의 영역을 더욱더 확고히 하면서 이 땅이 끝이냥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신만의 성을 쌓아야 합니다. 자기 이름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돈을 벌고, 자식을 키우고, 사업을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날마다 죽는 자로 만드셔서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날마다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지만 그 영역이 언제나 죽음의 자리로 만들어지는 축복을 성도는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됩니다. 주님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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