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25

푸른 섬 2015. 2. 1. 22:21

말과 능력

고린도전서 4:18-20

복음을 듣다 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르지요?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우리들이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복음의 능력에 대한 겁니다. 분명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나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도 많은 능력을 보여 주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듣는 십자가 복음은 그런 능력은커녕 말만 무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말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늘 듣는 소리가 너희들은 말 밖에 할 줄 모른다고 말하지요.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시잖아요. 이런 식으로 우리들을 공격해 올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주눅 듭니까 아니면 기뻐합니까?

 

십자가 복음이 생명의 복음이라면 내가 제대로 복음을 전하면 상대가 꼬꾸라졌으면 좋겠지요. 아무리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상대가 딴 소리 하면 괜히 열 받지 않습니까? 저만 그런 겁니까?

 

사무엘상13장8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께서 세우신 사울 왕을 버리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숨기 바빴어요. 사울 왕이 된지 이년 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울을 따르는 사람들도 벌벌 떨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사무엘 선지자가 오기를 이레 동안 기다렸습니다. 이레는 7일인데 사무엘 선지가가 길갈로 오기로 정한 날입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오지 않았어요.

앞에는 팔레스타인 마병과 병거, 군사들이 해변의 모래처럼 가득한 상황이고, 사울 왕을 따르는 자들은 벌벌 떨면서 흩어져 도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울 왕을 누가 세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셔야 할까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지요.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린 겁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제 시간에 도착해서 번제만 드려 주면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된다는 사실을 사울 왕이나 백성들이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사무엘 선지자가 안 와요.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사울왕은 자신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왕이 된 자신이 번제를 드리면 그것도 효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도착했어요. 그리고는 책망합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사울 왕이 그 이유를 상세하게 말합니다.

 

사무엘 당신은 정한 날 오지 않고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번제를 드렸다는 겁니다.

사울 왕이 번제 드린 이유가 타당합니까 타당하지 않습니까? 타당하지요? 누가 문제였습니까? 약속시간 늦은 사무엘 선지자가 문제잖아요.

 

여러분들이 사무엘과 사울 왕을 볼 때 누구 편을 들어주겠습니까? 당연히 사울 왕 편이겠지요. 물론 말로는 사무엘 선지자 편이라고 하겠지요.

사울왕의 입장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능력입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겁니다. 기다리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을 지키는 것은 지금 현실에서는 아무런 능력이 될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그 명령을 어기고 능력이 되는 번제를 드린 겁니다.

 

우린 이 본문을 보면서 사울 왕을 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이 사울 왕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 보다는 능력을 원합니다.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내고, 분노를 냅니다. 사울왕의 입장이 그런 입장입니다. 문제가 닥쳤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능력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문제해결이 능력이 아니라 순종이 능력이라는 겁니다.

 

정말 어렵지요. 아니 이건 불가능합니다. 우리들이 해 낼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린 본성상 능력을 원하지 능력 안 되는 말씀은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며 감사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란 나의 앞길을 평탄케 해 주는 것은 능력이지요.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이 없다면 그런 주님은 주님이 아니지요. 다락방이라는 곳에서 주장하는 것이 이런 겁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주님, 이것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라는 교회, 절간, 모든 종교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 문제는 자신이 다 해결합니다. 즉 자신이 신이지요. 기도는 신에게 해 놓고 모든 해결은 자신이 하는 겁니다. 마치 사울 왕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방식을 지지해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합니다.

 

정말 많이 듣든 말씀이지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항상 하는 말이 말만하지 말고 능력을 보이라고 합니다. 이미 그들에겐 능력, 말 이라는 단어가 고정되어 있어요.

마태복음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능력은 무엇입니까?

 

마귀가 40일 동안 굶주리신 예수님에게 꼭 필요한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돌로 떡덩이 만드는 것이 능력 아니냐고 시험한 겁니다. 돌로 떡 떵이 만드는 것이 능력입니까 아니면 말만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능력입니까?

 

이렇게 하면 입이 쑥 들어가 버립니다. 분명 고린도 전서 4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했는데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오히려 능력이 아니라 말에 있잖아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인데 그러면 서로 상충 되잖아요.

 

사람들이 왜 상충된다고 생각하는고 하면 사람들에게 능력이란 그야 말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능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행위입니다.

창세기4장에서 라멕이 왜 그렇게 큰소리칩니까? 자신은 능력 있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능력을 소유했다는 겁니다.

 

이런 모습이 바리새인에게서 보입니다.

마태복음19장에 재벌청년이 나옵니다. 자신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영생 얻을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말만 하라고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18장에서 예수님께서 빚진 자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갚을 것이 없습니다. 주인이 명했습니다. 그 몸과 아내, 자식들, 모든 소유를 팔아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면서 내게 참으소서 다 갚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종이 이렇게 말했지만 정말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못 갚지요. 그런데 주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불쌍이 여겨 놓아 주었어요.

 

이것은 종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주인이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겨 준 겁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했어요. 그러자 그 사람이 엎드려 간구합니다. 참으소서 내가 갚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던 사람은 그 사람을 빚을 갚도록 하기 위해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던 사람의 행실을 듣고 주인이 노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라고 하면서 그를 옥졸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용서가 능력입니까 아니면 말입니까? 분명 능력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용서받은 것이 능력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자신이 빚을 탕감 받지 못했을 때에 백 달란트 빚진 자의 심정을 얼마나 잘 이해했을까요?

그런데 용서 받고 나니 자신은 이제 빚 없는자, 잘난 자가 되었습니다.

 

로마 화폐단위로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 백 데나리온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석 달 월급이 적은 것은 아니지요.

문제는 예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라고 했어요. 말로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말로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지요. 그런데 마음은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라요. 자기 속에 일곱 인격이 산답니다. 그럼 자기라는 것을 포함하면 여덟인 격인가요? 자기 마음대로 안돼요. 불쑥불쑥 튀어 나와요. 킬미 힐미.

드라마는 나를 통제할 수 있지만 내 마음은 내가 조절을 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인간 능력 밖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만이 용서를 할 줄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용서를 할 줄 알까요? 나는 용서 할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임이 드러나면서 용서를 해요. 이게 능력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떤 용서를 원하나요. 뭐든지 다 용서하는 것이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용서는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게 해 주셔야 용서가 됩니다.

주님의 용서는 완료된 용서입니다.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용서입니다. 이미 영화롭게 하신 용서입니다. 말로만 영화롭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용서는 어떻습니까? 그런 용서 아님이 항상 들통 나는 용서입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눈앞에 보일 수밖에 없지요.

이것이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 땅이 정해 놓은 능력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능력이 아닙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말씀말씀하면서 말씀을 갖고 자신이 능력 있음을, 잘났음을 행세하니 그 말씀 말씀하는 것을 부정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능력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인간들이 능력능력하면서 자기 능력 있음을, 잘 났음을 자랑한다면 역시 이것도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십자가의 피가 흐르지 않는 말씀은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가 흐르지 않는 능력은 능력이 아닙니다.

 

마태복음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을 주님이 모른다고 합니다. 분명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기 때문에 선지자 노릇하며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사도바울이 당한 고난을 다 받았어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분명 주님의 이름에 의해 귀신이 쫓겼났지요. 누가 보아도 주님의 종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합니다. 병도 낫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립니다. 자기 이름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심판 날에 주님은 이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왜 주님은 이들을 모른다 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실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고생이란 고생은 혼자 다하고,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그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심지어 사람들이 말하는 순교까지 당했는데 주님이 모른다고 하면 얼마나 화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런 자들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행함 속에 십자가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행하는 주의 이름 속에는 십자가의 피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자기 자신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부인됩니다. 자신의 자리는 주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가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주님의 피로 용서 받은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은 잘난 인간이 되었습니다. 용서의 피가 늘 자신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 확인 시켜 주어야 하는데 그에게 용서의 피는 그야 말로 자기 자신을 빚없는 자로 만들어 주는 요술약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 시켜 주고,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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