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45 많은 주와 주 예수

푸른 섬 2015. 7. 19. 17:18

많은 주와 주 예수

고린도전서85-6

세상에는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는 말을 통해 자신은 제대로 된 신을 믿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즉 나는 예수님을 믿지 다른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제일 어려운 것이 자신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왜 나에게 복음 이야기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신과 많은 주, 즉 이것은 십계명에 근거하면 우상입니다. 십계명에 근거할 때 예수 믿는 나는 우상숭배하지 않는다고, 교회 나오면 나는 우상 숭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 구절은 그냥 지나쳐 가는 모양입니다.

 

목사들이 수도 없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외치지만 정작 이 본문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땅의 소산밖에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이 흘린 땀의 결과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피땀 흘린 결과물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 여러분이 돈을 벌지요. 직업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곳에서 돈을 벌기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고 눈물 흘리고, 고통을 감수하고, 어려움을 이겨 나왔습니까?

그 결과물이 돈입니다. 그래서 그 돈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왜 드렸겠습니까? 감사하기 때문에 드린 것입니다.

 

가인이 취미로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제사 지내는 것을 보면 취미로 제사 지내는 사람 없습니다.

형식을 간편화 한다 하더라도 제사를 재미로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나름 정성을 다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제물을 드린 것은 감사의 마음과 간절함이 듬뿍 담긴 제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대상도 분명했습니다. 여호와였습니다. 자신의 땀과 수고를 담은 제물이니 당연히 여호와께서 받으시리라 확신했습니다.

 

이런 말이 성경에 없는데 제가 왜 말하는고 하면 가인의 반응에서 이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받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여호와께서 받지 않았다는 것이 누구와 비교해서 받지 않았습니까? 동생 아벨과 비교해서 받지 않았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기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당연히 가인처럼 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양의 첫 새끼를 드릴 이유가 없지요.

 

문제는 아벨의 제물로 인해 발생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가인이 여호와께 드린 제물의 정체가 탄로 났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결정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자신이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벨과 비교할 때 나와 나의 제물이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도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냐?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심으로 인해 가인, 즉 선악과를 따먹은 자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이 갖고 있는 선이라는 용어로 가인에게 다가 왔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가인이 드린 제사가 우상숭배임이 드러납니다. 자기를 위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말은 아벨은 자기를 위해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이 아벨을 삼키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위한 제사를 드리는 아벨을 믿음이 집어 삼켜 믿음을 보여주는 제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믿음을 보여주는 자로 형 가인에 의해 살해 당합니다.

 

믿음이 주도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살기 위해 살아가는 아벨에게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이렇게 믿음 있는 자의 등장으로 인해 드러납니다. 즉 믿음의 등장이 아니면 우상숭배라는 것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짜 여호와를 믿는 자로 인정받습니다.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을 탈출 시킵니다.

거기에서 여호와께서 애굽의 신들을 치셨다라고 합니다.

민수기33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고 합니다. 애굽 땅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애굽 신을 치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도 역시 우상숭배 속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223절을 보면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언약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겐 단지 고된 노동이 너무 힘들었고 그러니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르짖었겠습니까? 우리도 정말 힘들 때 이 일 안했으면 좋겠다고 부르짖잖아요. 주님이 다 듣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부르짖음의 응답으로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음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하신 언약에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그 부르짖음을 광야생활 끝까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연장시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고통 해방을 위해 여호와께서 모세를 보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홍해를 만났을 때, 물이 없을 때, 자신들이 먹고 싶은 것이 없을 때마다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은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내가 소망하는 대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광야에서 모두 여호와에 의해 죽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죽였습니다.

 

모세를 통해 애굽을 탈출할 때에는 애굽과 다른 이스라엘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애굽을 탈출 한 후 이스라엘은 애굽과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출받은 이유는 그들의 부르짖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우상숭배자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이루기 위해 좋은 재료로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다니엘 3장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결국 우상이란 인간 자신임이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122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사탄의 종이라고 단언합니다. 어떤 입장에서 사탄의 종이라고 합니까? 율법을 지키는 입장에서, 말씀대로 사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그렇게 판단합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입장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사탄의 졸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십니다. 누가 사탄의 종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들, 율법을 지키는 자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사탄의 종입니다. 이들 눈에는 주님의 피로 베푸시는 은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 눈에는 오직 인간의 행함만이 보입니다.

 

율법에 근거한 행함이 바탕되지 않는 귀신쫓아냄은 사탄의 졸개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귀신을 쫓아낸다 해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다음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은 사탄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판단을 하는 자가 곧 독사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안식일을 말씀대로 지키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가인이 왜 아벨을 죽입니까?

정성을 다했는데 자기 것은 받지 않아서 기분 나빠 죽였습니다.

 

그러면 가인의 후손인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죽입니까?

왜 자신들의 수고와 땀, 희생을 무시하느냐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동조해 주어야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말씀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어느 누가 이들의 마음을 알아 외식하는 자들이라 했습니까?

 

이들의 율법 지킴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외식하는 자들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들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 말씀대로 사는 이유, 금식하는 이유,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 구제하는 이유가 들통 났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로마서102,3절을 보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분명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 열심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열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결국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내세우는 열심이었다면 자신들은 모두 죄인으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의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 내세우는 것이 됩니다.

 

세리와 창기가 이들보다 천국에 먼저 들어가는 이유는 이들은 자기 의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나쁜 자들이기에 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를 사용하셔서 오직 죄인만이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보여주는 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을 제대로 보여 주셨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는 말씀을 제대로 보여 주셨습니다. 율법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으로 드러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자였기에 자신들은 결코 율법을 범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들은 너무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주님은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가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한 행동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신이라는 것이 먼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는 인간이 바로 우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상에 많은 신과 많은 주라는 것은 곧 인간 자신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라는 사람이 신이란 인간의 자기 투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맞는 말을 했지요. 성경에도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신과 많은 주라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 드러납니다. 즉 복음이 전파될 때만 세상의 많은 신과 주가 드러납니다.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자기 자신이 그 누구도 세상의 많은 신과 많은 주 행세를 자신이 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면 그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납니다.

 

한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진짜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가짜 주를 꺼집어 냅니다. 가짜 신을 꺼집어 냅니다.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이 복음을 전하니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다.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한 율법지킴이 탄로 나자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사람의 심장을 도려 내는 칼입니다. 그래야만 많은 신과 많은 주가 드러납니다.

 

탐심이 우상 숭배라는 골로새서 35절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그 탐심이 자기 자신을 신으로, 주로 숭배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할 때 반드시 땅의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주님 섬김은 곧 자기 자신을 주로 섬긴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만 증거 되는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이 증거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