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47 자유

푸른 섬 2015. 8. 23. 15:16

 

자유

고린도전서88-13

출애굽기 5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1)

 

바로 왕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말 안 듣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여러분들은 바로 왕이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만한 놈이란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감히 하나님께 그런 말을 하다니 이런 놈은 지옥가야 마땅하다고 생각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왕이니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라고 생각됩니까?

 

우린 성경을 보면서 항상 관찰자에 입장에 있으려고 합니다. 관찰자의 입장이란 이런 것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암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는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독립군을 팔아먹는 자와 돈벌이 하는 암살자와 일본군이 등장합니다.

 

여러분들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자신이 어느 편인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것도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로와 모세를 봅니다.

이렇게 본다는 것은 자신은 절대로 바로 편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자신은 철저하게 모세편이라는 전제하에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린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자유자입니까? 바로가 자유인입니까 아니면 모세가 자유인입니까?

 

어느 누가 보아도 모세가 자유인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모세는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할 뿐입니다. 즉 종입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종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보아도 모세는 자유인이 아니라 종입니다.

 

이와 달리 바로 왕을 보면 바로는 자유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해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합니다. 여호와는 누군지 모르겠고 너희들 고생 더 해 봐라고 합니다.

 

여러분 누가 더 맘에 듭니까? 모세 편을 들고 싶은데 실은 바로 왕이 더 마음에 들지요? 사실 바로 왕처럼 우리가 살고 있지 않나요?

 

다니엘 5장을 보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 왕이 자신의 자유를 만끽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제사 기구로 술을 마셨습니다. 정복자의 즐거움입니다. 이스라엘 신은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신의 물건을 갖고 술을 마신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자신의 즐거움을 더 할 뿐이지요.

 

우리가 보기엔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유롭고, 그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벨사살 왕이나 바로왕 조차 주님의 종으로 이용될 뿐입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의 죽음과 함께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나라가 나뉘어 메대 바사 사람에게 준다고 썼습니다.

 

이것을 보세요. 벨사살 왕이 아버지 잘 만나서 섭정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신분이 따로 계셨습니다. 악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이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벨사살은 충실하게 그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벨사살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을 때 되어서야 알았지만 그 전체 내막은 모릅니다. 그러니 글자 해석을 해 주는 자에게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그날 밤 죽임을 당합니다.

 

자유가 있는 듯 없는 듯 없는 듯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론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자유를 원합니다. 개혁주의신학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말입니까? 자유의지가 있다면 이런 말 할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돈이 있으면 돈을 쓰면 되잖아요. 나 돈 있어 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나 돈 없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 됩니다.

 

에덴 동산을 보게 되면 인간에겐 처음에 자유의지가 있는 듯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가진 한계입니다. 자유 의지가 있어서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도출됩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 없어집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해하기 쉽지요.

 

그런데 요한복음1장에서는 처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선악과를 따먹도록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둘째 아담 되는 분, 하나님의 참 형상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첫째 아담이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자유가 무엇이고 간에 인간은 이미 창조 안에 가두어져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7일이라는 창조 안에 완벽하게 가두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 안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되신 예수님 만을 전하라고 만들어졌습니다.

 

달리 말하면 창조세계는 어린양의 피로 가득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2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자신이 가졌기 때문에 너희들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사도행전1장에서는 성령께서 증인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자유에 대해 얼마나 갈망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어둠이며 마귀의 종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아들과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 세상은 만들어 졌고 그 아들을 위해 세상은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것 하나 이 말씀에서 벗어나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이 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의 천사조차도 이것을 위해 움직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강퍅을 제대로 발휘합니다. 그래서 심판받을 자의 근거를 확실하게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말을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시는 차원에서 이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로도 바로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완악하게 하시는 분에 의해서 그는 완악할 따름입니다. 즉 바로자체에서 악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지요.

우리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천국가고 지옥간다고 생각합니다. 바로의 경우나 벨사살 왕의 경우도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악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악하게 하시는 분에 의해서 마귀의 종으로 충실히 활동함으로 지옥 갑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떻게 갑니까?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천국과 지옥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바로왕이나 벨사살 왕을 보면서 그들의 악함을 개인적 악함으로 보려고 합니다. 개인적 자유로 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로마서 914절 이하 말씀이 틀린 말씀이 됩니다.

 

바로왕이나 벨사살 왕은 왜 심판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할로서 그들의 인식에서 그들의 자유가 이용됩니다.

바로왕이나 벨사살 왕은 주님의 피를 모독합니다. 바로왕의 궁극을 보세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도 무로 돌려 버리기 위해 살아난 자들을 죽이려고 이스라엘을 추적합니다. 벨사살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 제도에 사용되든 도구. 까짓것 그게 무슨 대수라고. 우리가 전쟁하면서 제사기구 한두 개 뺏어 왔느냐. 이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뺏어온 제사 도구로 술을 퍼 마셔 보자. 잔치를 벌여보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은 저 작은 나라의 신에 불과한데 이미 우리에게 패했으니 그 신이나 내 손안에서 놀아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벨사살이 건드린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피입니다. 죄용서를 쏟아내는 기구입니다. 벨사살 왕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짓밟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나타날 짐승들, 왕들이 할 짓이라는 것이 다니엘서에 나옵니다.

 

사사기의 주제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입니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말은 자유롭게 산다는 말이지요. 달리 말하면 모세 언약에 매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율법제거라는 말입니다.

자신들은 더 이상 율법대로 죄용서 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대로 죄용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생각대로의 죄 용서를 원했습니다. 축복을 원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적합한 제사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자신들이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없는 데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없는데서 만들어졌는데 그들은 있는데서 자꾸 자신들을 있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왕도 만들어 보고 자기 힘도 과시해 보고 제사장도 마음대로 고용합니다. 제대로된 공의로운, 율법대로 긍휼을 아는 이스라엘을 건설하기 위해 베냐민 지파를 거의 진멸해 버립니다. 진멸한 후 문제가 생기니 또 자신들의 방법을 동원히 결원된 베냐민 지파를 채우려고 합니다.

 

바로 왕에서부터 출발된 어린양 짓밟기는 이스라엘을 거쳐 이스라엘의 포로와 함께 전 세계로 뻗어갑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자유로 발생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자유가 나오고 양심이 나옵니다.

분명 성경을 제대로 보면 자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는 왜 자유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자유라는 말을 사용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는 자유라는 단어를 꼭 사용해야 합니다.

무엇에 대해 자유입니까? 우상제물에 대해 자유입니다. 이제 우상 제물에 대해서 구속받을 일이 없습니다. 과거에야 몰랐기 때문에 우상제물을 먹으면 우상숭배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우상 제물 먹는 것은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우상제물을 먹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 양심입니다. 왜 갑자기 양심이 나옵니까?

우리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는 듯이 생각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없다고 해도 양심은 늘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고 해도 자유는 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자유와 양심이 어떤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인간들은 자유라는 것과 양심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자들이 앞서 말씀드린 바로왕이요 이스라엘이요 벨사살왕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을 받았다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생각이 나옵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가 무너지지요.

교회란 무너지라고 있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게 무슨 말인냐고요.

 

사람들이 왜 자유를 주장합니까? 자신이 무너지기 싫습니다. 바로왕이나 벨사살이 왜 자유를 만끽합니까? 그것은 자신을 더욱더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왕 노릇 하고 싶다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란 무너지라고 주신 자유입니다. 자신을 세우라고 주신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내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내 것이라면 자신이 왕노릇 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주신 자유는 왕 노릇 하라고 주신 자유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고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내 자유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주신 자유, 나를 무너 뜨리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고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들도 점심을 함께 해 먹지요. 어떻습니까? 먹는다고 더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먹지 않는다고 더 못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형제를 실족케 하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먹는 문제가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왕이 모세의 말을 듣고 여호와가 누구인데 내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겠느냐고 하는 말이나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제사도구로 술잔치를 벌이는 것이나 이제 주님 안에서 자유인데 나를 위해 살겠다고 하는 것이 동일한 성질입니다.

 

자유가 내 자유가 아님을 깨닫는 현장이 예수님을 믿는 현장입니다. 바로왕이나 벨사살왕은 절대로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것이 죄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 바로 왕이나 다르지 않지요. 우리나 벨사살 왕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들 평소 어떻게 살아갑니까? 주님이 누군데 그건 난 모르겠고 하면서 사시지 않습니까?

 

성도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십자가를 전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늘 자유가 무너지는 자리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깨어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무너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깨어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전할 길이 없습니다. 늘 깨어지는, 무너지는 자리로 인도함을 받는 주님의 몸이 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