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49 비판과 권리포기

푸른 섬 2015. 9. 6. 16:31

 

비판과 권리포기

고린도전서 93-6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본문이 무슨 말 하는지는 알아 들으시겠지요?

사도바울을 비판하는 자들, 다르게 표현하면 고소하는 자들,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이러하기 때문에 너는 지옥간다고 말하는 자들의 주장이 나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이 먹고 마시는 문제, 아내를 데리고 다니는 문제, 이 둘을 합쳐 일하는 문제를 시비걸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들이 보기에는 이들의 비판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개인주의 가족 중심주의 사회에서 사도바울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스스로 해결하고 그 목사의 아내나 자녀들에 대해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고 직접 노동해서 돈을 벌어 가면서 천국 복음을 전해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헌금하지 않고 천국복음을 듣는 다면 이것 보다 더 좋을 수 없잖아요.

 

뭔가 성경을 공부했거나 복음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이 그냥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말씀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먹고 마시는 권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 일하지 아니할 권한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야 말로 돈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복음전파에만 관심 있잖아요.

 

이런 목사를 원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목사를 원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무리들이 오늘 나옵니다.

이들은 사도바울을 고소합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바울 너처럼 살아서는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0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을 제외한 다른 사도들은 이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조차도 이 말씀에 집어넣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니 당연히 집어넣어야 하겠지요.

이들을 일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그들의 전공이 어부의 재능을 살리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이들의 복음을 듣는 자들이 헌금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이들이 먹고 마시며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 일하지 않는 권한을 행세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근거해 볼 때 누가 진짜 사도입니까?

사도바울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도들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면 사도바울은 사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명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는데 이 마땅함을 거부한다거나 아니면 그 마땅함이 제공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세우신 사도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금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이 무엇을 근거로 비난하는지 아시겠지요?

우리 같으면 헌금 하지 않고, 거추장스러운 아내까지 돌보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잖아요. 나는 나만 챙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근거해 볼 때 그들은 사도바울이 주님의 사도가 아님이 확실해졌습니다.

 

이들이 지금 어디에 관심 있습니까? 자기에게 관심 있습니까? 자기 가정에 관심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관심 있습니다.

너무나 의외지요?

 

우리들 생각에는 사도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이라면 그들은 말씀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비판 근거는 철저하게 말씀입니다.

 

왜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발생합니까? 그것은 십자가가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6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이 말씀을 자신이 지키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도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이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죽여버립니다.

 

재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자살해 버립니다.

 

지금 사도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예수님 말씀에 근거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를 비판합니까?

사도바울을 비판합니다. 주님의 영을 받은 사도바울을 비판합니다.

 

그 비판의 근거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놀랍지요? 저들은 예수님께서 왜 그 말씀을 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백성을 십자가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로 인도한다는 말은 성령께서 우리를 죄인되게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잘났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린 헌금 제대로 한다. 우린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만 사도로 인정한다면서 자기 자신들이 얼마나 믿음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인가를 자랑합니다.

 

아마 이들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 있을까요?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일꾼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니 네가 만일 진짜 주님의 영을 받은 자라면 주님이 너를 먹여 살리나 살리지 않나 한번 보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팔짱끼고 구경합니다. 살펴 보니 결국 아내가 일해서 먹고 살고 있거든요. 그렇게 되니 결국 너도 주님이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고 아내가 먹여 살리는 구나. 너도 별수 없구나. 그러니 네가 복음 전한다는 자라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라면 먹고 마실 권리,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 일하지 않을 권리를 행세해야 제대로 된 말씀에 근거한 목사인데 그렇지 않으니 그냥 너도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 자구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사도바울을 본 받아라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어디 돈에 매였느냐. 사도바울이 어디 아내에 매였느냐? 세상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주님이 주신 권리마저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주님의 증인이다. 그러니 너도 진짜 목사라면 사도바울처럼 살아아라고 비꼽니다.

 

이런 사람들은 헌금하지 않습니다. 왜 내가 목사를 먹여 살려야지. 목사는 지가 일해서 먹고 살면 되고, 그것은 이미 사도바울이 미리 모범을 보여 줬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사도바울의 모습이 멋지잖아요.

 

창세기25장에 보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여호와께 기도해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쌍둥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뱃속에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차이를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집안이 두 패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나중에 자동적으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으로 결론이 나도록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개입이 인간의 본능을 꿈틀거리게 합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아담과 여자를 자극했듯이 지금도 에서와 야곱,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를 자극합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쪽에 유리한 데로 적용합니다. 결국 야곱은 하나님마저 싸워 이깁니다. 지난번 제가 하나님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런 것입니다. 그때 야곱은 자신이 그동안 의지해왔던 힘이 제거 됩니다. 힘이 제거되니 그에게 남은 것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 외에는 자신이 기댈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붙들어 온 것들이 헛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식으로 십자가지신 예수님만을 증거하도록 몰아갑니다. 주도권을 주님이 다 뺏어 버립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께서 야곱을 그런 식으로 끌고 다니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하는 이야기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권리를 포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자기 자신이 권리를 포기했다면 결국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의 이야기는 주님이 나를 그렇게 살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나를 먹고 마실 권리를 포기하는 자로, 아내 데리고 다니는 것을 포기하는 자로, 일하지 않는 권리를 포기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내가 헌금해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엉터리라는 말입니다.

또 달리 말하면 내가 헌금 하지 않고서도 네가 복음을 전하는가 보자는 것도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을 비판하는 자는 성경 말씀을 자신이 지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지신 주님이 일하심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믿음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헌금하지 않게 하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헌금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요. 권리를 쓰지 않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야만 감사가 나옵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헌금 안했다. 내가 헌금 했다. 내가 권리 행사 안했다가 되어 버리면 그 다음 나오는 것은 원망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했다. 안했다가 되어 버리면 뭔가 원하는 바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기대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저는 먹고 마실 권리,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 일하지 않을 권리를 포기하고 뼈빠지게 직접 돈벌어 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 주님 저에게 뭘 해 주시겠습니까가 됩니다.

 

이들은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습니다. 실상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그 마지막은 사도바울이 걸었던 길, 주님의 십자가 길이 코스로 예정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정말 원하는 것은 그래도 이 세상에서 뭔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헌금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내가 주님이 나를 최소한 나쁘지 않게는 살게 해 주시겠지. 그래도 천국은 주님이 넣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자기 자신이 헌금한 사람은 어떨까요? 그 헌금의 효과를 기대하겠지요.

그냥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근거하여서 효과를 기대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주님 자신을 증거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말씀을 통해 나를 증거 하려고 합니다. 나의 존재 증명을 해 보겠다고 덤벼듭니다.

 

다니엘5장에서 벨사살 왕이 성전기구로 술잔치를 열 때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썼습니다.

벨사살 왕의 얼굴빛이 변하고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쳤습니다.

엄청 떨었다는 말이지요. 그래도 해석자를 찾을 때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해석을 하면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만 한다면 내 손안에서 얼마든지 그 말씀을 다룰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낯선 것의 개입과 그 낯선 손이 쓴 글로 인한 두려움은 곧장 자신의 왕 됨을 맘껏 뽐내는 계기가 됩니다.

 

실상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들이 달아서 부족하고 그래서 넘겨졌다는 말씀인데 우리들은 말씀을 보면 자신이 죽은 자로 발각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를 생각합니다.

 

실상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자신이 죽은 자로 드러나야 합니다. 일꾼이 그 먹는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은 죽은 자를 주님이 그렇게 다루신다는 말씀이지 너는 살았으니 너는 먹을 것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용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오직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도록 하십니다.

 

성도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신은 죽으면서 주님이 어떻게 자신 안에 사시는 가를 보여 줍니다.

너희들은 말씀이 있으면 말씀을 갖고 너희 자신이 살려고 하지만 나는 말씀이 있기에 나는 죽고 주님이 사는 것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에 이용당하는 자로 주님만 증거하는 자가 주님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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