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51

푸른 섬 2015. 9. 20. 19:25

 

신령한 것과 육신의 것

고린도전서911-14

요한복음3장을 보면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으로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니고데모가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예수님을 이렇게 평가할까요? 요한복음 앞부분에 나오는 것은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전해 들었든 모양입니다. 아니면 다른 여러 표적들을 보았을 수도 있겠지요. 물론 성경에서 니고데모가 구체적으로 어떤 표적을 보았는지 들었는지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평가하는 기준은 분명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표적들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으로 인정합니다.

 

이런 니고데모의 평가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어느 누구도 너의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211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표현은 중의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니고데모수준의 믿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도 여전히 예수님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님의 영을 받지 않은 상황이기에 그들 수준에서 예수님의 표적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지신 주님이 성령을 보내 주신 후 제자들은 이 사건을 달리 보게 됩니다.

십자가 피로 이루신 나중 기쁨은 이전 기쁨을 완전히 삼켜 버렸습니다.

 

이처럼 니고데모도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지금 너의 관점은 틀린 관점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니고데모의 평가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에 대해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방법에 대해 질문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좀 알아듣는 말을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물이라는 것은 땅의 요소이니 뭔가 해석해 낼 여지가 있지만 성령은 우리 인간 손 안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물로 거듭난다고 해 버리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잖아요.

 

물에 들어가 죽고 다시 산다. 아니면 깨끗이 씻는다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지요.

문제는 성령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물이라는 부분도 우리 입장에서 함부로 해석해 낼 수가 없게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물이라는 기능이 죽이고 다시 살린다. 깨끗게 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거듭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개입된다는 말은 안다고 해서 거듭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육은 영원히 육일뿐이요 영은 영원히 영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뛰어 넘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난 사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들 눈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육으로 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영으로 난 사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들 눈에는 모두가 다 육으로 난 자들이지만 그 중에서는 영으로 난 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영으로 난 자들은 바람처럼 결과물만 보여 줍니다.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이 분 것을 알지요. 이처럼 흔들리면 성령으로 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난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의 결과물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으로 났다는 말을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을 보니 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임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육을 입은 자가 자신의 눈으로, 귀로, 느낌으로, 마음으로 평가한 예수님은 다 가짜 예수라는 말입니다.

즉 지금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평가한 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평가한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십자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피 흘리심이 증거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빼고 표적을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으로 얼마든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아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게 되면 영으로 난 자가 만들어 집니다.

육으로 난 자의 관심은 자신이 원래 하려는 목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육신에 필요한 물에만 관심이 있고,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에만 관심이 있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자들은 여전히 육신의 양식에만 관심 두는 자로 남겨 둡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는 영으로 난 자임을 제대로 보여 줍니다.

 

정말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은 여자가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단절입니다.

 

여자가 나름 성경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지만 그 지식이 메시아를 믿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로라 하신 말씀이 그 여인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죄인으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죄 용서를 알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메시아가 오면 알려 준다는 그 지식도 소용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 사실을 알 정도라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은 몰랐겠습니까?

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면 이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고한다는 말씀이 지식 전달, 정보 전달, 이해 시켜준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능력으로 다가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친히 믿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여인의 과거는 필요 없는 것이 됩니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전의 내용들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의미가 있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일뿐임을 제대로 보여 줌으로 영으로 난 자임을 증거 합니다.

 

우린 구원을 더 이상 더러운 과거가 필요 없는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평생 십자가 피만을 자랑하는 죄인으로 살게 하시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의 죄를 자랑하지요. 자랑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 죄를 자랑할 때 주님의 피는 더욱더 돋보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신령한 것이 나오고 육적인 것이 나오지요.

여러분은 무엇이 신령한 것이고 무엇이 육적인 것이라 생각합니까?

 

우리의 분류기준은 간단합니다. 주님과 관련되면 모든 것이 신령한 것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다 육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직장생활이 신령한 것에 속합니까 아니면 육적인 것에 속합니까?

 

우리가 밥 먹는 것은 영에 속한 겁니까 아니면 육에 속한 것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항상 자신의 행동을 선과 악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이처럼 육과 영도 그런 식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 중 어떤 것은 육적이고 어떤 것은 영적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령한 것이라고 나오지요? 그러면 신령한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 전파입니까? 우린 당장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육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여러분 신령한 것은 우리 쪽에서 행할 수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일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신령한 것을 뿌리는 일을 하는 자들, 즉 성전의 일을 하는 자들, 제단을 모시는 자들, 복음 전하는 자들을 신령한 것을 뿌리는 자들 속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번 이들이 하는 일을 보면 육의 일입니까 영의 일입니까?

육이 일을 하지요. 육이 복음을 전하고 육이 제사를 드립니다. 육이 성전의 일을 감당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어떻게 신령한 일이 됩니까?

 

그것은 복음이 신령한 일로 만들었습니다. 신령한 것을 뿌리는 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임을 보여주는 자가 신령한 것을 뿌리는 자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성전의 일을 하기 때문에, 제단의 일을 하기 때문에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죄를 용서하심을 자신들의 행위를 부정하는 가운데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증거하는 자로 이용되기에 그들은 신령한 일을 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과거에는 십일조를 했지요. 그래서 그 십일조가 레위인들에게 돌아갔고 제사장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이 일은 영적인 일입니까 육적인 일입니까?

 

영적인 일입니다. 어떻게 영적인 일이 됩니까? 그들의 십일조는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는 십일조입니다. 자신들의 땀과 수고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 은혜로 살아감을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자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이 곧 출애굽 말씀이잖아요.

 

애굽에 사로잡힌 자를 주님이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육으로 난 자가 보이게는 육적으로 보이지만 주님 쪽에서는 영으로 보십니다.

 

이처럼 신령한 것을 받은 자들이 육적인 것, 즉 돈을 낸다는 것은 육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게 어렵습니다.

문명 돈 내는 것은 너무나 세속적이고, 그 돈을 받아 생활한다는 것도 너무나 육적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육적인 것을 사용하셔서 영적인 것으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헌금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육으로 난 자들인가 아니면 영으로 난 자들인가를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신령한 것을 뿌렸지만 자신들은 육적인 것을 거두는 것은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인들이 육적인 자들인지 영적인 자들인지 분별이 됩니다.

 

지금 사도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은 말씀을 육적으로 해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을 뿌렸다면 예수님 말씀대로 육적인 것을 당연히 거두는 모습을 보여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대로의 권리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예수님의 주되심을 제대로 증거하는 방편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야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소자들이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자신들이 진짜 영으로 난 자들이라고 주장할 것이 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적인 것을 갖고 사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발부둥 쳐도 육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육적인 재료들을 이용해 영적인 자들로 만드십니다. 새 창조 하십니다.

그 방법은 복음만을 전하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에만 관심이 있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고린도전서 129절을 보면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2절에서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육적인 것을 갖고 자기 자랑을 합니다. 헌금을 해도 기도를 해도, 봉사를 해도, 성경을 읽어도 늘 그 행위를 한 주체인 자기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영으로 난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행위들을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선이지 복음보다 더 우선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복음이 말씀을 부정해 버리지요.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몰라요.

모세의 율법이 복음에 의해 부정당해야 함을 몰랐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 이해를 부정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해는 곧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율법이해입니다.

율법 어디에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라는 말입니까? 역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복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영으로 난 자들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우리를 살리지 밥이 우리를 살리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오해가 그것이지요. 먹을 것 염려하는 인생들이었지요. 이들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육적인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육적인 것이 영적이었지요.

 

오늘날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아라고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일용할 양식이 너를 살려. 돈이 너를 살려. 힘이 너를 살려. 그래서 말씀을 떠나게 만듭니다. 주님의 피를 무로 돌리게 만듭니다.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신다는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았을 때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의 생계가 위협받았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결단은 사람이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떡으로 산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 입에서 말씀이 율법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왜 거짓을 말합니까? 예레미아 810절에 선지자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왜 것을 행합니까? 간단합니다. 돈이 되고 권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이 땅에서 살아갈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육으로 난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십자가 증거하지만 마지막인 그 십자가를 이용해 먹고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십자가를 이용해 자기 힘을 키울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도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제사장처럼 십일조가 들어오지 않을 때 거짓을 행하는 것처럼 행한다면 그 사람을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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