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53

푸른 섬 2015. 10. 18. 19:10

 

사명

고린도전서 916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이 나옵니다. 부득불 복음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부득불 이라는 말의 뜻은 이해하시겠지요?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복음을 전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생각하는 전도란 어떤 것입니까? 내가 순종해서 기꺼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복음을 부득불 전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기에 이제는 자원하여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 때문에 부득불 설교를 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지만 이것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말씀입니다.

 

예레미야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에베소서 14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처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레미야가 아들들 역할을 하도록 세웠다는 말입니다.

 

로마서819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아들들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맏아들로 되게 하시기 위해서 아들들이 미리 정해 정해졌습니다.

 

예레미야는 비록 구약의 선지자이지만 맏아들을 증거하기 위해 모태에 짓기 전에 거룩히 구별하였고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물론 예레미야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다고 하지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자를 사용하십니다.

 

아이라고 말하는 예레미야를 여호와께서 내가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고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1019절을 보면 너희를 넘겨 줄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예레미야나 성령 받은 제자들이나 동일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은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는 역할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역할을 받았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마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건설하고 심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일을 먼저 하게 된다면 어느 누가 예레미야를 환영하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 선지자를 환영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환영할 이유가 없겠지요.

자신들이 우상을 섬긴 것은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부득불 하는 일이 어떤 일입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주님의 증인이라는 것은 세상에 대해 너희들은 뽑혀야 하고 파멸해야 하고 넘어져야 하며 지옥가야 마땅하다. 지금 여기가 지옥이라는 것을 외치면서 심고 건설하는 일입니다.

 

성령 받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세상에 대해 너무나 부정적입니다. 너무나 부정적이기 때문에, 지옥가야 마땅하다고 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부득불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요. 내가 복음을 제대로 전해야지.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더라도 그 핍박을 내가 기꺼이 받아야지. 혹시 나를 불 속에 집어넣더라도 기꺼이 들어가야지라고 해서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불속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일들이 부득불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화가 미친다고 합니다.

 

주님은 도무지 우리 입장을 전혀 고려해 주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화가 자신에게 임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솔선수범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철저하게 주님께서 입에 주신 말씀대로 그 말씀에 이끌리어 복음을 전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분명 자신이 복음을 전했지만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밖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눈에는 십자가 지신 주님이 보입니다. 이 차이가 오늘 본문에 대해 이해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사도바울 밖에 안 보이는 자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억지로 흉내 내려고 하지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는 일이 부득불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얼마든지 자랑할 것이 생기지요.

나는 복음을 억지로라도 전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득불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친다는 말은 복음은 반드시 부득불 전해야지 자신이 알아서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자신이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은 곧 주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창세기 37장 이하를 보면 요셉이 자신이 꾼 꿈 자랑으로 인해,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우리가 요셉이라면 무엇을 원망하겠습니까?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편애한 아버지를 원망하겠습니까?

아니면 꿈을 자랑한 자신을 원망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형제들을 원망하겠습니까?

 

아니면 애굽으로 팔려 가게 된 것을 감사하겠습니까?

 

시편10517절에서 19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을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의 꿈이나 꿈 자랑이나 아버지의 편애나 형들의 시기질투나 형들이 요셉을 판 모든 것들이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이것을 상상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요셉이 이것을 알았겠습니까? 몰랐습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차후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기455절에서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렇게 말씀은 요셉을 단련시켰습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이 요셉을 그러한 인생으로 끌고 다니신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자신의 인생을 말씀이 인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자기 자랑 늘어놓지 않겠습니까?

형들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진짜 자신이 왕노릇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들은 말씀이 요셉을 다루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요한복음8장을 보면 음행 중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 당신은 어떻게 말하는지 한번 들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나가고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식으로 죄 용서함 받고 싶습니까?

죄 용서 해주시려면 좀 조용히, 쪽 팔리지 않게 죄용서 해주시면 안 됩니까?

 

왜 율법이라는 것을 먼저 주시고, 그 율법으로 인해 많은 사람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죄용서 해 주시는 방식입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니 자신의 처지를 다 아시니 조용히 찾아와서 죄용서 하시고 구원해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런 식이 바로 부득 불 이 여인이 맞이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우린 우리 자신들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뽑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화를 당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이 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득불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나 자신이 알아서 기도하고 알아서 전도하고 알아서 헌금하고 알아서 복음 전하고 알아서 성경을 읽고 읽으려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화가 임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인생은 부득불 사는 인생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들이 돈 벌고 자식 키우고 하는 모든 일들이 부득불 하는 일입니다.

이 말은 곧 이것으로 인해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만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부득불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동적 사고와 행동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자에겐 화가 임합니다. 지옥 갑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역사교과서 때문에 좀 시끄럽습니다.

정부 입맛에 맞추어 역사교과서를 편집하겠다고 정부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런 것은 독재시대가 하는 짓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들 양측의 주장은 책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역사왜곡을 하는 나라들이 여럿 있잖아요. 실제로 그것이 먹혀 들어가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먹혀 들어간다는 말은 그 세계가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예수 안 세계는 이것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세뇌시킨다고 세뇌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유대교에 세뇌된 자들이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이지요.

그래서 그는 세뇌된 대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지신 주님의 영이 그를 바꾸었습니다. 어떤 교육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세뇌도 아닙니다. 어떤 반복학습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영에 의해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영에 의해 움직여지는 인생이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영이 임하기 전 인생조차도 주님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여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부득불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부득불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부득불 복음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린 부득불 사는 인생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4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은혜로 사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것 하나의 내 땀, 내 수고가 담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피 공로로 주어진 은혜의 산물들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수고하여 일하는 것조차도 부득불 하는 일이요, 월급 받는 것도 부득불 받는 것이요, 휴가 가는 것도 부득불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공부 잘한다고 자랑하겠습니까? 돈 많이 벌었다고, 자식 좋은 대학 갔다고, 공부 잘한다고, 공부 못한다고, 부자 되었다고, 권세 가졌다고 자랑합니까? 화가 임합니다.

성도에겐 이 모든 일이 부득불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은 주님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밖에 자랑하지 않는 자들에겐 화가 임합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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