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52

푸른 섬 2015. 10. 11. 15:14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일하시는 주님

고린도전서 915절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그 권리 행세를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법입니다. 권리가 있음에도 그 권리 행세를 않는다는 것은 바보와 같습니다. 물론 권리를 행세안하고 놀러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한국같은 곳에서 선거할 때보면 투표율이 50%도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그들 눈에 당장 뭔가 이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투표하면 백만원을 받는다고 해 보세요. 투표하지 않을 사람 있습니까?

 

권리라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내 권리 주장합니다.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러니 주님의 권리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고려 대상은 내 몸, 내 가정, 내 민족, 내 나라 밖에 없습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를 보면 그들은 주님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권리만 생각합니다. 내가 먹고 싶은데 무엇이 문제인가?

 

내가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것이 내가 행세할 권리다.’ 라고 생각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가인은 자신이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잖아요. 내 죄 벌이 너무 무겁습니다. 이 죄 벌을 가볍게 해 주세요라고 빌고 또 빕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과 똑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살기에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병이 들었습니다. 병 고쳐 주세요. 돈이 없습니다. 돈 주세요. 사업이 잘 안됩니다. 사업 잘되게 해 주세요. 자식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자식 공부 못하는 것이 저에겐 너무나 큰 짐입니다. 너무 무겁습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모시기 힘드니 이 짐을 가볍게 해 주세요.

 

눈만 뜨면 이런 기도하잖아요. 어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도 재현되기를 기도합니까? 사람들이 절이나 성당 같은 곳에 가서 무얼 빌겠습니까?

 

내 마음 편안하게, 내 가정이 행복하게, 내 나라가 평화롭게, 전 세계가 사랑이 넘치기를 기도하지 어디에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기를 기도합니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성당에 가보니 그곳에 나무십자가 세 개를 만들어 놓았어요. 물론 그 나무에 사람의 형상도 걸어 놓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 강도들이라고 해 놓았겠지요.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 지는 인생을 사는 인생으로 살게 된 것에 감사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성당에 가면 고해성사하는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곳이지요. 죄 고백해서 뭐하겠다는 것입니까? 속 편하게 살자는 것 아닙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는 해 봐도 죄 용서 받았는지 모르겠고, 신부에게 하면 신의 대리자니 보다 실제적이잖아요.

 

인간이 과연 속편하게 살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죄인인 주제에 무슨 자기 속 편하게 살 생각합니까?

 

죄인이라면 타인이 가하는 죽음에 죽어야 당연합니다.

가인이 그 당연함을 거부하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가인을 죽여버립니다.

 

병 낫게 해 달라고 하면 들어 줍니다. 돈 달라고 하면 들어 줍니다. 공부 잘하게 해 달라고 하면 들어 줍니다. 들어 주셔서 죽입니다.

기도 들어 주셨다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주님이 지옥보내시기 위한 조치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211,12절을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니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십니다.

 

그야말로 미혹의 역사입니다. 그래야만 거짓 것, 즉 우상을 믿지요. 마귀를 믿습니다. 그래야만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심판받게 하기 위해 미혹하는 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권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망이 왕노릇합니다. 죽음이 왕노릇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들은 죽음이 왕노릇하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 밖에 못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하는 모든 것들은 사망이 자신들의 왕임을 보여주는 일 밖에 없습니다.

 

가인의 기도가 그러하고 우리 인간들이 눈만 뜨면 하는 기도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네가 안 쓴 것이 아니라 네가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사도바울 너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돈 달라는 것이구나.’ 라고 비아냥 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 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여러분 사도바울의 이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더더욱 돈 달라고 하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아니면 다른 느낌이 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말씀을 해석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해석한다면 이런 식의 해석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면 사도바울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라고 평가하든지. 그런데 이런 식의 평가는 자신이 제 삼자의 입장에 있을 때나 하는 평가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자신이 오히려 말씀을 평가하고 있다면 그 사람 또한 자신이 뭔가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죽을 지언정 이라고 하면서 줄임말이 그 뒤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죽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죽이시면 죽겠다는 말이지 이 말을 하므로 자신을 뽐 낸다든지 아니면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받아 챙기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바울 자신이 죽어야 주님만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자신은 오직 주님만 증거하라고 사용되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랑하는 십자가를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도록 나는 이렇게 굶어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 개인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말씀입니다.

 

성도를 누가 사용합니까?

내가 내 몸을 사용할 권리가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내 몸을 사용할 권리가 있습니까?

 

사사기13장 이하를 보면 삼손이 나옵니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삼손 자신은 자신이 나실인이며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기 시작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계획을 세웁니다. 삼손은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취향을 이용해 블레셋 사람을 칠 궁리를 해 냅니다.

 

그 첫 번째로 딤나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는 계획입니다.

그래서 결혼식 날 삼손이 계략을 짰습니다. 수수께끼를 통해 블레셋 사람을 치겠다는 계획입니다.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내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낸 수수께끼는 삼손만 아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러니 딤나에 거하는 블레셋청년들이 도저히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의 아내에게 말해 그 수수께끼를 알아냅니다. 칠일동안 삼손이 아내가 삼손 앞에서 울면서 강요하니 어느 누가 그 눈물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결국 삼손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여호와의 영이 임해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옷을 노략하여 약속대로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삼손이 심히 노하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그런데 왜 노합니까?

아내가 그 답을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이 정답을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까?

 

사실 삼손의 계획대로 되었지요. 아스글론 지역도 역기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삼손이 죽인 삼십 명도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삼손은 자기 나름의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계획이 무너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신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역할을 나름대로 충실히 감당하려고 나름대로 계획을 짭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감정을 그 자신이 콘트롤 할 수 없습니다. 딤나 여자가 좋았고, 그 여인의 눈물에 넘어가 자신의 계획을 스스로 망쳐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중에 나실인의 역할을 하도록 하십니다.

 

물론 삼손은 이것을 자신의 허물로 돌립니다(15:3). 삼손은 뭔가 정당하게 블레셋 사람들을 칠 계획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얼마 후 삼손은 다시 자신의 아내를 찾아 갑니다. 그런데 그 아내를 삼손 친구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내 동생이 더 아름다우니 아내의 동생을 아내를 대신해 새 아내로 맞이하라고 합니다.

삼손은 이 때다 싶어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매 달아 그 홰에 불을 붙여 그것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았습니다. 이때가 밀 거둘 때였습니다.

곡식단도 있고 아직 베지 않은 곡식들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불이 탔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도 불에 탔습니다.

 

그러자 이 일의 원인을 알게 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와 그의 아버지를 불살랐습니다.

삼손의 아내와 아버지는 블레셋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희한하게 일을 진행시키시지요.

 

이젠 블레셋 사람이 블레셋 사람을 불사르게, 진멸하게 하십니다.

이일로 인해 블레셋은 다시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습니다.

 

완전 뒤죽박죽이지요. 어떻게 보면 삼손이 미친 사람 같습니다. 자기가 화가 나서 가버렸고 그래서 당연히 장인이 자기 딸을 삼손이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삼손친구에게 주었을 뿐입니다. 이것도 그 당시 풍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찾아와서 아내를 내어 놓으라고 하니 그게 말이 됩니까?

장인이 아내는 친구에게 주었고 아내 동생과 결혼하라고 한다고 해서 화가나서 온 동네를 불 살라 버렸습니다.

화가나면 장인을 죽이면 되잖아요. 왜 동네를 불사릅니까?

 

결국 이 일로 장인과 삼손의 아내가 불살라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는 이것 때문에 또 원수가 발생해서 블레셋 사람들을 죽입니다.

도대체 자기 책임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망나니 같은 삼손을 사용하셔서 나실인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이 일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를 치러 올라 왔습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어 줍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죽음에 내어주는 유대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블레셋 사람 천명을 나귀의 새 턱뼈로 쳐 죽입니다.

 

자신들은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살려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사기 16장을 보면 삼손이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삼손은 이 여인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잘리고 다곤 신전에서 제사 드리고 즐거워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결국 삼손은 죽일 때에 죽은 블레셋 사람이 살았을 때 죽은 블레셋 사람들보다 더 많았습니다.

 

두 번이나 여자 때문에 곤욕을 치렀지만 삼손의 마음은 삼손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삼손의 계획은 오히려 자신의 취향으로 인해 다 무너집니다. 더 이상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삼손은 자신이 죽음으로 나실인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권리가 삼손에게 있다고 생각되지만 삼손에겐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자기 권리를 행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2631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똑 같이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권리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닭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조차 주님께서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좋은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절대 헛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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