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54 상

푸른 섬 2015. 10. 26. 08:40

 

고린도전서 917-23

성도는 사명자로 살아갑니다. 성도의 삶 자체가 사명의 삶입니다. 그러니 나의 결정에 의해 내 삶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차원에서 성도의 삶이 펼쳐집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을때부터 그렇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을 때부터입니다.

 

그러니 성도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 펼치시는 인생인데 어찌 감히 주님께 저에게 이런 인생을 주셨습니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 중에 맨 처음 이런 불만을 품었던 자가 여자입니다. 동산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먹지 말라는 말씀이 매우 불쾌합니다.

 

여자란 가장 늦게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만들어 놓으신 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 말은 곧 여자의 삶이란 철저하게 제한 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새가 물속에 들어가서 살수 없다는 원리와 같습니다.

물고기가 땅에 나와 살수 없지요.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살려 주시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악과를 왜 먹지 말라는 것인가? 내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하나님이 두려운 것인가?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또한 문제는 이런 환경에 놓여 졌을 때 가인이 취하는 태도도 여자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왜 나의 정성과 희생은 받지 않지?

그래서 아벨을 죽입니다.

 

여자는 이후 하와라는 이름이 되어 자신의 삶이 선악과를 따먹어야 하는 인생임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가인의 경우는 그것을 모릅니다.

왜 자신이 아벨을 죽여야만 했는지를 알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알았을까요? 몰라요. 죽은 후 알게 되었지요. 아하 내가 형에게 죽어야 하는 것이 창세전 그리스도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의 모습임을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벨과 다릅니다.

성도는 압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다 끝내신 분 안에 성도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삶임을 압니다.

그래서 만일 아벨처럼 죽더라도 그 죽음이 감사함으로 받아 들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죽음은 능동적 죽음이 아니라 피동적 죽음입니다.

 

이 세상 사람 중 어느 누가 자신의 죽음을 좋아하겠습니까? 스데반 집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사명이 그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십자가의 영이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괜히 내가 나서서 그런 길 가겠다고 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길을 걷겠다고 발벗고 나섭니다. 이들이 성경에 대한 이해는 이 세상 방식입니다.

 

모든 원인을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훈련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내가 성령의 능력을 행세한다는 것이지요.

 

그저께 어떤 목사님들을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한국에 두 날개인제 세 날개인지 그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목사가 지금 이단시비에 걸렸답니다. 우리 모두 다 이단인데 무슨 새삼스럽게 이단 운운합니까?

문제는 자신은 절대로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왜 자신이 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십자가의 영이 지금도 홀로 죄인을 갖고 일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 세상 아이디어를 다 끌어 당겨 교인 수 부리는데 미쳐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아들을 주님으로 세우시겠다는 아버지의 창조목적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의 자리에 자신들이 앉아 있습니다.

 

여섯째 날 만들어 놓으니 주변 자연환경들이 모두 다 자신들을 위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창세기를 볼 때 그런 식으로 보잖아요. 창세기 보면서 십자가가 안 보입니다.

문화 사명이 보이지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만 보입니다.

 

그 말씀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인데 자신의 능력 과시의 장으로 이 세상을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상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상이란 본래 누구에게 줍니까?

어떤 부분에 있어서 공을 세웠을 때 주는 것이 상입니다. 물론 상 주는 분이 따로 있지요. 그런데 성도란 상 받을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15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앞서 아브람이 전쟁을 했습니다. 롯을 사로잡아간 연합군과 전쟁을 해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롯을 구해 돌아 왔습니다. 이 때 소돔왕이 나와 아브람을 영접했습니다. 영접이라는 말 속에 소돔왕이 전쟁 승리한 아브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분이 나왔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갖고 나왔습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했고,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아브람은 말을 듣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소돔왕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겠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은 이 전쟁의 승리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돔왕이 볼때에는 이 전쟁은 분명 아브람의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속한 사람만 보내고, 다른 전리품들은 전쟁에 승리한 아브람 당신이 가져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람은 시리 오리기 하나라도 자신이 가지지 않겠다고 하면서 모두다 소돔 왕에게 돌려 줍니다.

떡과 포도주를 갖고 나온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림으로 아브람은 이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전리품들이 전쟁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돔왕이 전쟁의 승리를 아브람에게 돌리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돌리고 나머지는 아브람 당신이 가져라고 합니다.

 

진짜 전쟁은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소돔왕은 자신이 아브람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에게 하는 행동을 통해 진짜 원수가 소돔 왕 자신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여러분. 소돔왕의 문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쉽게 바꾸어 질문하겠습니다.

 

어떤 학생이 시험을 쳐서 만점을 받아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를 칭찬합니까? 그 학생을 칭찬하지요. 그 학생의 수고와 노력을 칭찬하잖아요.

어느 누가 주님을 자랑합니까? 물론 말로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말로 한다면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겠지요.

 

별로 와 닿지 않습니까?

그러면 공부 못해서 대학을 못 가서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면 그 학생에게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공부 못하게 한 주님을 찬양하라고 합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너 열심히 못해서 결과가 그런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쟁을 누가 열심히 했습니까? 소돔왕이 볼때에는 아브람이 열심히 했어요. 그가 목숨걸고 전쟁 해서 대단히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아브람을 칭찬해야지요.

 

그런데 멜기세덱은 누구를 칭찬합니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히려 아브람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하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전쟁에서 승리해서 전리품 엄청 챙겼으면 그게 복이지 무슨 다른 복이 있습니까?

 

명문대학 간 것이 복 아닙니까? 공부 못해 일일 노동자 하는 것이 저주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람은 이 말씀에 아멘합니다.

 

그러면서 나온 말씀이 여호와께서 나는 네 방패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다르지요. 전쟁도 여호와께서 홀로 하셨고 상급도 이 땅의 재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은 상 받을 일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상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일에 사용되는 것이 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상입니다.

18절부터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것을 다 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권리는 분명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이익이 되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육신의 이익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상 받고 싶습니까?

목사들 중에 이런 상 받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은 이런 상을 받았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유 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상입니다. 그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기 위해서랍니다.

이렇게 말하니 돈 벌기 미친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이용해 사람 끌어 모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말하는 더 많은 사람이라는 뜻은 뒷 구절을 보게 되면 그런 뜻은 숫자 많은 이야기가 아님르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이방인, 약한 자들을 말합니다. 카멜레온처럼 사람에 따라 변신하는 겁니다. 마치 트렌스포머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벤츠타는 사람은 벤츠타는 행세를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한답니다.

물론 이것이 상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이유는 복음에 참예하고자 하기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도바울이 복음에 참예하기 위해 이런 모든 것을 행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것을 행함 자체가 복음에 참예한 자의 모습, 즉 상 받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상을 좋아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도 상을 받고 죽어서도 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 땅에서 돈 받이 벌고, 명예를 얻고, 성공하고, 건강한 상을 받고 죽어서는 천국에서 이 땅의 부자처럼 살지만 이 땅과 달리 아무 염려없이 자신의 즐거움이 영원하기를 바라지요.

 

이런 상 천국에서는 없습니다.

많은 전도 하고 많은 봉사하고, 기도 많이 해서 받는 상은 없습니다.

 

상은 처음부터 주님 것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십자가 지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오직 그 십자가 지신 주님이 받으신 상에 참예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사는 자체가 늘 상 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성도를 주님의 몸의 지체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형편 원망할 이유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음에 참예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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